세계일보

검색

[기자가만난세상] 언론계 은어 배우는 홍보직원들

관련이슈 기자가 만난 세상 , 오피니언 최신

입력 : 2019-12-06 22:41:31 수정 : 2019-12-12 23:46:34

인쇄 메일 url 공유 - +

“혹시 기자님께서 어떤 야마로 기사를 쓰려고 하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상냥한 목소리에 어색함은 없었다. 기자를 향한 배려이겠거니 싶으면서도 당황스러웠다. 일본어에서 나온 언론계 은어를, 이 친절한 직원은 어찌 이리도 자연스럽게 내뱉게 됐을까.

 

얼마 전 한 공공기관에 취재를 위한 자료를 요청하고자 전화를 걸었다가 생긴 일이다. 전화를 받은 이는 홍보팀 소속. 기자를 상대하는 게 업무라지만 기자가 아닌 이에게 ‘주제’나 ‘핵심’ 대신 ‘야마’라는 단어를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누구보다 우리말을 바르게 써야 할 기자들이 사실 일어로 소통한다는 비밀은 ‘우리’만 아는 게 아니었다.

 

곽은산 정치부 기자

“그런 말은 누구한테 배우셨는지” 도로 전화해 물어보기도 그렇고. 초년생 기자로서 일반적인 상황을 겪은 건지 궁금해 대기업 홍보팀에서 일하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회사에서 따로 배우는 건 아니지만 기자들과 친한 직원은 그런 말을 종종 쓰기도 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친구는 일본에서 중학교를 다니며 ‘조센징’이라는 차별적 표현을 몇 번이나 겪었다. 그래서인지 기자 아닌 이들까지 언론계 은어를 쓰고 있다는, 그래서 일제 잔재가 사라지기는커녕 언론을 통해 퍼지고 있다는 황당한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에 적극 공감해 줬지만 “그래도 기자들이랑 친해지려면…”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친구의 말이 현실적인 걸까. 홍보직 등 기자를 자주 만나는 이들을 위해 언론계 은어를 소개한 내용이 담긴 PR(Public Relation·공공관계) 관련 멘토링 책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인터넷에 ‘기자 은어’를 검색하고 내게조차 생소한 ‘게찌’(기사에 대한 항의), ‘미다시’(표제어) 등 용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놓은 블로그 글들을 한창 읽었는데, 그 내용은 해당 멘토링 책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대학시절 들었던 신문방송학과 수업 내용을 빌려 ‘중학교 2학년생이 읽어도 이해할 수 있는 기사’를 써야 하는 기자들이 독자들은 모를 은어로 소통한다는 사실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게다가 이제는 기자를 접하는 이들까지 정체 모를 일본어를 공부하는 시대라니.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슬퍼하고 한·일 경제갈등을 걱정하는 평범한 국민들이 좋아서 언론계 은어를 배우고 있으리라 생각이 들진 않아 씁쓸했다.

 

‘야마’를 배우는 홍보직원은 언론이 변하지 않아 생긴, 언론의 슬픈 자화상일 테다. ‘쓰메끼리’(손톱깎이), ‘바께쓰’(양동이)는 이제 거의 쓰지 않는 말이 됐는데 ‘사쓰마와리’(기자가 정보를 얻기 위해 경찰서 등 출입처를 정기적으로 도는 일), ‘야마’는 여전히 자연스럽게 쓰는 걸 보면 그렇다. 수습시절 야마의 어감이 싫어 선배 앞에 되바라지게도 꼬박꼬박 “주제”라고 말하던 기자의 모습 역시 온데간데없어진지 꽤 됐다.

 

최근 해질녘 한강 물빛을 보고 “윤슬”이라 말하는 친구에게 그 말이 예뻐 뜻을 되물은 일이 있다. 어릴 적 어머니께 얼핏 들었던 뜻은 언제인지 모르게 잊혀 ‘햇빛에 비쳐 반짝이는 잔물결’의 우리말이라는 친구의 설명으로 돌아왔다. 세상엔 잊기 아쉽지만 잊어버린 아름다운 것들이 있고 잊어야 하는데도 구태여 붙잡고 있는 것들이 있다. 상황을 바꿀 수 있는 건 누구보다 우리말을 많이 쓰고, 바르게 써야 할 ‘우리’다.

 

곽은산 정치부 기자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전지현 '눈부신 등장'
  • 전지현 '눈부신 등장'
  • 츄 '상큼 하트'
  • 강지영 '우아한 미소'
  • 이나영 ‘수줍은 볼하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