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계 거장, 정지영(73) 감독은 낙관적 현실주의자다. 한국사회 현실을 직시하며 매번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그 기저에 더 나은 사회에 대한 고민, 희망이 깔려 있다. 오는 13일 개봉하는 ‘블랙머니’도 마찬가지다.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의 외환은행(현 KEB하나은행) 헐값 매각 사건을 극화한 이 영화는 금융자본주의와 금융 비리, 모피아(기획재정부 전신 재정경제부와 마피아 합성어)를 생각해 보게 만든다. 재발을 막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 단, 영화가 어렵고 재미없을 것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지난 6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정 감독은 스스로를 “예술영화 감독이 아니라 대중과 만나는 영화, 대중 영화감독”이라 칭하면서 “관객들이 어떻게 영화를 쉽고 재밌게 보게 만들지 고민했다”고 힘주어 말했다.

◆‘외환은행 헐값 매각’ 극화…정보 최소화, 재미는 극대화
‘블랙머니’는 검사 양민혁(조진웅)이 누명을 벗으려 헐값에 팔린 대한은행에 흘러든 검은 돈(Black money)의 흐름을 추적하다 사건의 실체를 마주하는 과정을 그린다. 정 감독은 여태 그래왔듯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했다. ‘블랙잭’(1997), ‘부러진 화살’(2011)을 함께한 한현근 작가와 수많은 인터뷰, 자료 조사를 거쳤다. 엔딩 크레디트에 이름을 올리진 않았다.
“이제 작가를 존중하자는 의미에서 이름은 뺐습니다. 워낙 복잡하고 정보가 많은 이야기라 작업이 어려웠어요. ‘부러진 화살’과 달리 사건만 있지 모델을 찾을 수 없어 캐릭터를 창조해야 했죠. 정보가 많을수록 관객들은 골치 아파하니 정보를 최소화하며 설득력 있게 이야기하기 위해 많이 고민했습니다. 외국 투기 자본이 어떻게 한국의 은행을 싸게 먹고 튀었는지, 후유증은 뭔지에 초점을 맞춰 픽션을 가미했죠.”

영화는 양민혁과 그에 대조되는 대한은행 법률 대리인인 변호사 김나리(이하늬)의 ‘선택의 연속’이다. 두 인물이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해하다, 이내 ‘나라면 어떻게 할지’ 생각에 빠지게 된다. 정 감독은 “모두 현실적 인물이기 때문”이라 했다. 그가 천착해 온 주제는 신나게 사는 사회, 이를 가로막는 걸림돌이다.
“우리가 신나고 재밌게 사는 사회가 좋은 사회라고 봐요. 신나게 살지 못하게 하는 사회가 된 이유는 뭘까, 항상 생각해요. 시스템이죠. 특히 기득권자들이 자기들 세계를 깨뜨리기 싫어하는 이기주의가 매 작품에 들어가 있습니다.”
공무원이 고발 의무를 다하는 것이 기득권 카르텔을 깰 방법이라는 게 영화의 메시지다. 양민혁이 외치듯 형사소송법 234조 2항은 ‘공무원은 그 직무를 행함에 있어 범죄가 있다고 사료하는 때에는 고발하여야 한다’고 못 박고 있다. 정 감독은 “검찰 당국은 공무원의 고발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가, 많은 부분 그렇지 않을 것”이라며 “사람들 의견을 듣다 보니 나온 아이디어”라고 설명했다.
“영화를 찍을 때도 많은 사람 얘기를 듣습니다. 선택은 내가 하지만 아무거나 얘기하라고 하죠. 내 머릿속 아이디어나 이데올로기를 갖고 소수의 사람과만 만나고 싶지 않아요. 보다 객관적 시각은 뭔지 염두에 두고 선택합니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고초…관객·영화계에 ‘토론’ 당부
정 감독은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1982)로 데뷔한 뒤 37년간 주로 실화를 다룬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영화를 넘나들며 꾸준히 활동해 왔다. 박근혜 정부 시절 ‘남영동1985’(2012)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올라 고초를 겪었다. ‘블랙머니’를 개봉하기까지 6년이 걸린 이유다.
“우리가 쉬쉬하거나 모르는 이야기들이 소중한데도, 즉 어떤 역사적 의미를 담아야 하는데도 지나치는 게 안타까워서 그런 소재를 찾아 즐겨 만듭니다. 다큐멘터리 영화는 남들이 만들지 않으니 한 거고, 극영화는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가진 감독들이 많지 않은 것 같아 하는 거예요. 감독이란 게 뭡니까. 남들이 안 하는 짓을 해야지. 사명감까진 아닌 것 같고, 하고 싶어서 하는 건 분명합니다.”

그가 바라는 건 자신의 영화로 토론의 장이 열리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내 영화를 보고 토론하고, 설왕설래가 있음 좋겠어요. 그냥 재밌게 보고 마는 건 싫어. 그러다 보니 아마 철저한 상업영화를 만드는 게 아니고 항상 어떤 화두나 의미를 담아내는 거겠죠. ‘블랙머니’ 재밌게 봐 주시고, 재밌게 보셨다면 좀 떠들어 주세요.”
영화계에도 활발한 토론을 당부했다.
“영화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점칠 수 없어요. 영화인과 영화 기업들이 위기를 극복해 나갈 방안을 같이 끊임없이 연구해야 해요. 현실이 완벽할 순 없어. 제도나 시스템이 바뀌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기거든. 문제는 끊임없이 개선해 나가야 합니다.”
날카로움, 그 이면엔 따뜻함과 유쾌함이 있었다.
박진영 기자 jyp@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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