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진명은 스스로 역사론을 펼쳐내온 작가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시작으로 25년이 넘도록 역사소설과 정치소설에 천착해 온 김 작가와 만났다. 인터뷰는 최근 두 권짜리 두툼한 역사소설 ‘직지’(사진) 출간 간담회를 겸해 지난 24일 세계일보 접견실에서 두 시간여 동안 이어졌다. 밀리언셀러 작가다운 담론과 탁월한 이야기 솜씨로 빛을 발하면서도 묵직한 메시지를 던졌다.

-지난 1000년간 인류의 삶을 바꾼 발명의 으뜸으로 구텐베르크 금속활자가 꼽혔는데.
“인쇄혁명으로 인류의 인지가 급속히 발달하고 모든 사람이 지식을 나누게 되었으니 분명 올바른 평가다. 하지만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를 발명이라 칭하는 건 옳지 않다. 발명이란 최초라는 의미 아닌가. 최근 프랑스 학자 ‘드로니용’이 전자현미경으로 ‘직지(직지심체요절)’와 ‘구텐베르크 성경’의 지면을 면밀히 비교 조사한 결과 직지가 구텐베르크에게 전파되었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소설 ‘직지-아모르마네트’는 그 전말을 소설로 엮은 것이다.”
-현대 한국의 맥락을 이해하려면 먼저 조선왕조를 파악해야 한다고 했는데.
“조선왕조 500년은 오로지 중국만 보고 살았다. 맞다 틀리다가 모두 중국에서 나왔다. 나라 이름도 ‘화영’으로 할지 ‘조선’으로 할지, 왕이나 왕후가 죽으면 5일장인지 7일장인지를 중국에 물었을 정도였다. 게다가 조선의 모든 학문은 유학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니 유럽의 중세 암흑기보다 더 컴컴한 터널이었다. 오로지 유학의 시대였으니 자아와 자기 정체성이 형성될 수 없었다. 현대는 자신의 권리와 의무를 진지하게 인식하는, 개인 자질이 성공의 필수조건이다. 그러나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자아를 묻은 채 살아왔으니, 요즘 우리 사회가 상대를 배려하거나 존중할 줄 모른 채 도를 넘은 탐욕과 아집에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다.”
-이해가 간다. 그럼에도 역사소설 작가로서 가슴 뿌듯한 장면을 복기해 본다면.
“을지문덕, 이순신, 한글 등을 꼽을 수 있다. 서양에서 가장 큰 전쟁이 페르시아전쟁이었지만 그 규모는 몇 십만이다. 그런데 수 양제가 동원한 군사는 전투병만 113만명이고 군비, 식량 지원대까지 합쳐 170만명이었다. 이런 대병력을 을지문덕이 제압했고 이는 수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적장 우중문에게 보내는 ‘전승이 이미 높으니 만족하고 돌아가는 게 어떻겠나’ 하는 시에서는 담대함과 여유로움, 무엇보다 전쟁은 시작하기 전에 이미 승부가 나 있는 법이라는 손자병법의 경지가 느껴진다. 이런 대전쟁은 그 후로도 없었다. 이순신은 전 세계 장군들이 가장 본받고 싶어하는 인물이다. 133척이라는 적의 대군 앞에서 불과 십여 척을 가졌음에도 ‘상유십이 순신불사’(尙有十二 舜臣不死: 아직 열두 척이 남아 있고 내가 죽지 않았으니)라는 말에서는 눈물이 날 지경이다. 한글 창제는 인류사의 정점을 찍은 위업이다. 세계 언어학자들은 지구상에 5개 언어만 남을 걸로 본다. 영어, 중국어, 아랍어, 스페인어 등 모두 15억 이상의 인구가 쓰는 언어이지만 이 중 사용인구 1억도 안 되는 한글을 포함시켰다. 세종의 ‘내 이를 가엾이 여겨 새로 28 글자를 맹그노니’에 들어 있는, 나보다 약한 자와의 동행이라는 정신의 구현은 인류의 지식이 어떤 방향성을 갖춰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안타까운 대목을 꼽는다면.
“위화도 회군이다. 고대 우리 무대는 만주였다. 원·명 교체기 만주는 주인 없는 만주대륙이었다. 고려는 혼신의 힘을 다해 정병 5만을 이성계에게 쥐어주며 북방개척을 기대했다. 그러나 그는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렸고 이후 한민족은 한반도 안에 갇히게 되었다. 더군다나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의 철학으로 내세운 건 이소역대(以小逆大)였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면 안 된다는 이 지침은 이후 조선의 통치이념이 되어 사대를 자초했다.”

-그간 여러 소설을 내면서 가장 의미 있는 일화를 소개한다면.
“광개토대왕 비문에서 사라진 글자 중 하나를 찾아내 일본의 임나일본부 왜곡을 퇴치시킨 일화다. 압록강 연변 만포 건너편에 고구려 수도였던 국내성이 존재했다. 1800년대 후반 홍수로 엄청난 토사가 쓸려나간 후, 큰 비가 드러났는데 광개토대왕비였다. 장수왕이 아버지의 업적을 기록한 비인데, 오랜 세월 땅 속에 묻힌 터라 잔뜩 이끼가 끼어 있었다. 이 비의 탁본을 전문으로 하던 현지 주민 초붕도가 비를 불태워 이끼를 제거하는 바람에 매우 중요한 두 글자가 훼손되었다. 사라진 건 ‘백제 ○○ 신라’ 사이의 두 글자였다. 당시 지안에서 이를 눈여겨 본 일본군 장교 사코 가케아키는 비의 탁본을 구해 바로 본국의 합동참모본부로 달려갔다. 만세를 부른 일본군 수뇌부는 최고의 학자들을 동원했다. 사라진 글자가 ‘임나(任那)’였다는 논문을 대거 발표하게 했고 이것이 임나일본부설이라는 세기적 역사왜곡의 근거가 되었다.”
-임나일본부의 왜곡이 그렇게 치명적인가.
“한반도는 과거 일본의 영토였다는 게 이론의 골자인데, 이에 따라 고토 회복의 열풍이 일본을 휩쓸었고 일본의 한반도 침탈의 근거가 되었다. 그러던 차에 1967년 이진희라는 재일학자가 일본군이 비에 석회를 발라 글자를 조작했다고 발표하여 우리 학계가 환호작약했던 적이 있지만 사실은 큰 착각이었다.”
-고 최인호가 소설을 써서 일반인들도 다 알게 된 그 석회도말론인가?
“그렇다. 1995년대 무렵 한중 수교 직후 바로 광개토왕비를 찾아나섰다. 당시 거대한 비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는데 물론 석회는 없었다. 석회는 바로 비에 녹는다. 그런데도 일본인들이 석회를 발라 비를 조작했다는 주장 자체가 말이 안 되지 않는가. 그러다 연구 도중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애초 초붕도가 비를 불에 태우기 전 비문 글자를 모두 옮겨 적어 놓은 저본이 존재했다. 초붕도는 죽기 전 이 저본을 조카딸에게 건네주었는데 조카딸은 이걸 40여년간이나 다락방에 내버려뒀다. 당시 중국 최고 광개토왕비 전문가 왕찌엔췬이 추적 끝에 이 저본을 찾아냈다. 안 보이는 두 글자 중 하나를 발견했는데, 동녘 동(東)이었다. 이 글자에 의해 비의 해석은 전혀 달라진다. “신묘년에 왜가 백제 임나 신라를 깨뜨렸다가 아니라, 백제가 동쪽으로 신라를 침략하여 왕(광개토왕)이 친히 수군을 거느리고 건너가 백제를 깨뜨렸다”로, 매우 자연스럽게 해석된다. 하지만 왕찌엔췬은 이 저본을 발표하지 않고 숨겼다. 그 저본의 마이크로 필름을 내가 찾아낸 것이다.”
-도쿄대학에서 제대로 사실을 밝혔다는데.
“일본 사학계의 광개토왕비 연구 1인자인 도쿄대 동양사학장을 만났다. 그에게 저본을 담은 마이크로필름을 내보이자 그는 2시간 동안 1800자가량의 모든 글자를 샅샅이 대조했다. 동(東) 자가 위조되었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걸 확인한 다음 그는 손을 떨며 담배 3대를 꽁초까지 피웠다. 이어 “사실 광개토왕비의 안 보이는 부분에 임나를 넣는 것은 옳지 않다”고 고백했다. 100여년 만에 처음 일본 학자의 양심이 제자리를 찾은 것이다. 이어 그는 “과거 군국주의 시대 우리 일본 학자들도 어찌할 수 없는 현실적 어려움이 있었다. 한국민들께 진정 죄송하다. 내가 집필했던 고교 역사 교과서에서 내년부터 임나일본부를 빼겠다”고 했다. 2017년까지 역사교과서에서 임나일본부설이 완전히 삭제되었다. 광개토대왕비를 소재로 쓴 나의 소설 ‘몽유도원’을 떠올릴 때면 진심으로 사죄하던 그 학자의 표정이 늘 떠오른다.”
-역사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한일이 첨예하게 맞부딪친다.
“한일관계는 경제측면에서도 중요하지만 주한미군 철수 차원에서 들여다보아야 한다. 미국 내에서도 주한미군 철수 여론이 일고 있다. 미국 입장에서는 일본-호주-인도를 축으로 하는 방어라인 형성이 훨씬 현실적이고 효율적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 한일 대결로 나가는 건 ‘하책 중 하책’이다. 한국과 일본이 꽉 뭉쳐 있을 때 주한미군 철수는 생각하기 어렵다. 일본 또한 한국이 북중러 축으로 기울면 미래의 일본도 결국은 위태롭다는 걸 알아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갈등을 해소하려면 ‘의미의 차원에서 이익의 차원’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즉 아베 총리도 문재인 대통령도 승자가 되는 길을 찾아야 한다. 중재가 필요하다. 즉 중재자가 ‘두 나라는 나의 중재안이 나올 때까지 서로에게 취한 공격적 조치를 유예하기 바란다’고 하면, 두 나라는 내심 웃으며 받아들일 상황이다. 시간을 끌어도 된다. 트럼프는 이 역할을 거절했으므로 오바마나 낸시 펠로시가 적당하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때부터 북핵에 천착해 왔는데 협상은 잘되어 왔을까?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 핵과 미사일에 전력을 경주하던 북한이 방향을 급선회한 건 공포 때문이었다. 괌, 오키나와에서 출격한 전폭기들이 풍계리 상공에 이르렀을 때 공포는 최고조에 달했고 핵실험 중지로 이어졌다. 그때 한국이 달려든 게 문제였다. 미국과 북한 둘만을 외나무다리에 놔두었어야 했다. 옆으로 비켜날 채널이 생겼다. 중국도 달려들고 러시아까지 들려들어 북한으로선 숨 쉴 여유를 갖게 된 것이다. 빠져나갈 통로가 생겨난 것은 핵문제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다.”
-어떻게 될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미국의 내년 대선이 끝난 이후에야 북핵의 진정한 해법이 모색될 것이다. 지금은 미북이 서로 진심으로 대화하기가 어렵다. 트럼프 대통령이 만약 지금 와서 군사공격을 감행한다면 지금까지 허송세월했다고 실패를 자인하는 꼴이다. 오히려 김정은을 두둔해야 한다. 대선에 김정은을 써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둘 사이엔 겉만 번지르르한 속빈강정 합의가 나올 것이다. 하지만 양측 다 이 합의를 신뢰하지 않는다.”
이른바 문학상을 통해 등단한 작가가 아닌, 자신만의 길을 통해 저명작가로서 자리를 굳힌 김진명 작가는 ‘극단적 민족 성향’ 혹은 ‘과도한 상상력의 작가’라는 비평을 듣곤 한다. 하지만 작가 자신은 “다만 나는 작품 한 편, 한 편에 목숨을 다해 내가 아닌 우리의 문제를 담아낼 뿐”이라고 답한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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