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으로 창을 내겠소.’ 어린 시절 교과서에 만난 이 시에서 시인 김상용은 호미로 풀을 매고 새 노래를 들으며 “왜 사냐건 웃지요”라며 해탈의 경지에 이른 이의 낙천적인 여유를 들려준다. 남향인 집에 살면 하루종일 밝은 햇살을 집으로 모실 수 있으니 성격도 밝고 명랑해질 것 같다. 남향도 물론 좋지만 서로 난 창도 있다면 금상첨화다. 구름이 적은 맑은 날이면 환상적인 저녁노을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누구는 일몰을 보면 슬퍼진다고 한다. 마치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보는 것 같다며. 하지만 요즘처럼 날씨 좋은 가을날 노을 풍경은 슬픔보다 아름다운 감성이 앞선다. 해가 천천히 떨어지면서 투명한 하늘과 옅은 구름 결을 붉게 채색하는 풍광을 바라보고 있으면 인생도 황홀한 색채로 물드는 듯하다. 제주 애월, 한림, 안덕 등지에는 아름다운 바다의 노을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 있는데 요즘 입소문을 타면서 여행객의 ‘일몰 성지’가 되고 있다.
#병풍 절벽 위로 떨어지는 장엄한 낙조를 보다
서귀포시 안덕면 대평리의 박수기정. 대평포구 앞에 높이 100m에 달하는 절벽이 수평선을 향해 병풍처럼 펼쳐져 있어 보는 이를 압도한다. 중문의 주상절리나 애월 해안도로의 해안 절벽이 합쳐진 것 같은 멋진 풍경을 이제야 만나다니. 제주는 세계적인 관광지답게 곳곳에 이런 절경들이 숨어 있으니 다리가 튼튼할 때 좀 더 부지런히 다녀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제주올레 9코스의 시작점인데 올레길은 박수기정의 윗길로 연결된다. 소나무가 무성한 산길을 따라 천천히 걷다보면 정상의 평지에 오르는데, 아름다운 대평포구와 대평리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고 산방산, 형제섬, 마라도, 가파도까지 조망할 수 있다. 박수기정의 낙조를 제대로 즐기려면 박수기정의 절벽 위보다는 대평포구가 좋다. 해안에서 병풍처럼 쭉 펼쳐진 박수기정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노을이 장관이다. 특히 자갈해안의 유리알처럼 투명한 물 표면에 노을이 반사되면서 환상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인근에는 카페들도 많아 여유 있게 커피를 마시며 박수기정의 일몰과 바다를 함께 즐길 수 있다. 박수는 샘물이고 기정은 절벽이란 뜻으로 ‘바가지로 마실 수 있는 깨끗한 샘물이 솟아나는 절벽’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재미있는 전설이 하나 내려온다. 용왕의 아들이 대평리에서 학식 높은 스승을 모시고 3년 동안 공부했는데 서당 근처 냇물 소리가 너무 시끄러웠단다. 이에 용왕의 아들은 냇물 소음을 없애 달라는 스승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떠나면서 박수기정을 세워 소음을 막았다고 한다.
#카페에서 즐기는 여유로운 저녁노을
애월 한담해변 주변에는 예쁜 카페들이 하나둘 생겨나면서 요즘 젊은이들에게 반드시 가봐야 할 일몰 성지로 자리 잡고 있다. 대표적인 카페가 봄날카페, 몽상드애월, 하이엔드제주 등이다. ‘지드레곤’ 카페로 인기를 얻은 몽상드애월은 통유리로 만들어진 벽을 통해 푸른 제주 바다와 햇살을 맘껏 즐길 수 있어 인기가 높다. 요즘같이 기온이 적당한 날은 카페 내부보다 밖의 벤치가 더 좋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면서 시시각각 색을 달리하며 바닷속으로 빠져드는 저녘 해를 감상할 수 있어서다. 연인이라면 주변 사람들에게 둘이 나란히 앉은 뒷모습을 찍어달라고 꼭 부탁하자. 두 사람의 실루엣과 붉은 노을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사진 한 장이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남긴다.

사실 이곳은 봄날카페로 먼저 떴다. 드라마 맨도롱 또똣에서는 주인공이 일하던 카페로 등장했는데 알록달록한 동화 속 카페가 동심으로 이끈다. 목적지는 몽상드애월이었는데 주변을 걷다 보니 지중해 휴양지 느낌의 카페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자세히보니 테라스의 말랑말랑한 소파에 비스듬하게 누워 바다 풍경을 감상하는 연인들이 몰려 있다. 이곳이 하이엔드제주로, 3층까지 테라스 곳곳에 이런 소파나 누울 수 있는 시설이 마련돼 편안하게 노을을 만끽할 수 있다.
#‘찰싹찰싹’ 파도 소리와 함께하는 일몰의 낭만


노을 명소 카페들 근처에는 한담해변이 자리 잡고 있다. 애월에서 곽지까지 한담해변을 따라 산책로가 1.2㎞ 가량 이어지는데, 구불구불한 해안의 모습을 그대로 살려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바로 손이 닿을 듯한 거리가 바다여서 찰싹찰싹 파도 치는 소리를 들으며 여유롭게 걸을 수 있다. 걷다보면 아름다운 바윗돌도 만나는데 살짝 힘들지만 바윗돌에 오르면 쪽빛바다와 푸른 하늘, 저 멀리 카페들을 배경으로 멋진 사진을 남길 수 있다.
제주에서 손꼽히는 해변인 금능해변과 협재해변도 일몰 명소다. 이들은 쌍둥이처럼 닮았는데 투명한 에메랄드 빛 바다가 붉은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면 지중해변에 서 있는 듯 환상에 빠진다.
#수월봉에 올라 즐기는 차귀도 낙조
제주 서쪽 끝 한경면 바닷가는 ‘노을해안로’로 이름 지어질 만큼 일몰 명소다. 특히 해발 77m 높이의 수월봉에 오르면 탁 트인 풍광이 가슴을 시원하게 만드는데, 차귀도로 드리워지는 저녁노을이 장관이다. 수월봉 정상에서 기우제를 지내던 수월정 옆엔 우리나라 남서해안 최서단 기상대인 고산기상대가 우뚝 서 있다. 5층 전망대에 올라 일몰을 감상하면된다. 깎아지른 듯한 수월봉 해안절벽 ‘엉알’은 동쪽으로 2km가량 뻗어있는데 곳곳에는 샘물이 솟아 오르는 약수터 ‘녹고물’이 있다. 수월봉 해안 절벽을 따라 화산 퇴적물이 쌓이면서 만들어진 지질 트레일도 장엄한 풍광을 선사한다.

국내 최대 복합 리조트인 제주신화월드 호텔 앤드 리조트가 지난 7월말 새로 조성한 가족형 리조트 신화리조트관에도 저녁노을 명소가 등장했다. 야외에 마련된 스카이 풀로 곶자왈, 산방산, 모슬포 앞바다, 가파도, 마라도까지 한눈에 담을 수 있는 빼어난 조망을 지녔다. 따뜻한 스카이풀에 몸을 담그고 불타는 듯한 저녁노을을 감상하는 색다른 경험을 즐길 수 있다. 풀사이드 스낵바인 바온탑에는 다양한 간식 거리와 음료가 마련돼 있다. 투숙객들은 스카이 풀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제주=글·사진 최현태 선임기자 htcho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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