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바로 앞 피고인석에 헤르만 괴링과 루돌프 헤스가 앉아 있었죠. 유대인 강제수용소의 참상이 담긴 사진이 법정에 증거물로 제출되자 괴링은 자기 손을 헤스 머리 위에 올려놓고선 ‘다 거짓이야. 믿지 마’라고 말했어요.”

제2차 세계대전 종료 후 독일의 옛 나치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열린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당시 독일어와 영어의 통역을 맡았던 알프레드 로이킷츠(92)의 회상이다. 1927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태어난 로이킷츠는 독일어가 유창해 2차 대전 기간 중 18세의 어린 나이로 전범 재판 통역사가 되었다.
19일 미 육군 산하 국방언어연구원(Defense Language Institute)에 따르면 이 연구원의 초청을 받은 로이킷츠가 최근 연구원을 방문, 연구원장인 게리 하우스먼 대령 등과 2차 대전을 주제로 진지한 대화를 나눴다.
공군이 독립하기 전 육군 항공단 소속이었던 로이킷츠는 나중에는 공군으로 옮겨 주한미군에서도 복무했다.
“어릴 때부터 독일어를 쓰며 자랐어요. 1945년 육군에 입대했을 때 처음에는 탱크를 부수는 대전차포 요원 훈련을 받았죠. 그런데 막상 유럽 전선에 배치되는 순간 제 독일어 실력이 인정을 받아 세계사의 결정적 순간을 기록하는 역할이 주어진 것이죠.”
나치 독일에서 아돌프 히틀러 다음가는 ‘2인자’였던 괴링이 헤스한테 “(연합군이 제시한 유대인 강제수용소 사진을) 믿지 마”라고 했을 때 로이킷츠는 ‘참으로 뻔뻔하다’ 싶어 속으로 분노했다고 한다. 전범 재판이 열리기 몇 달 전 그 자신이 철도로 독일 전역을 이동하면서 유대인 강제수용소의 참상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다.

“멀리서도 냄새로 알 수 있어요. 강제수용소 앞에 도착한 순간 악취를 도저히 견딜 수 없었죠. 거기서 학살당한 이들의 주검을 봤어요. 시신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죠.”
전범 재판에서 괴링은 사형을, 헤스는 종신형을 각각 선고받는다. 괴링은 1946년 10월 형이 집행되기 직전 독극물을 마시고 자살했으며, 헤스는 40년 넘게 복역하다가 1987년 8월 교도소 내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유대인 강제수용소 내 가스실에 주입할 독가스를 만들어 나치에 납품한 공장 주인들도 전범 재판에 출석했다. 법정에 선 그들에게 ‘당신들이 무엇을 제조하고 있는지 정말 몰랐느냐’는 질문이 떨어졌다.
“공장을 소유한 아주 부유한 독일인들이었죠. 결국 그들이 만든 독가스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죽음을 낳은 겁니다. ‘왜 그랬느냐’는 연합군 측의 힐난에 하나 같이 ‘독가스 생산 명령을 거부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취지로 답변하더군요.”
국방언어연구원 관계자는 “2차 대전의 영웅들과 직접 목격자들이 하나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이때에 로이킷츠 같은 분들과 만나 얘기를 나누고 그분들의 경험담을 경청하는 일은 갈수록 더 중요해지고 있다”고 전했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