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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년 전 일본의 항복 현장에 '윤봉길의 혼' 깃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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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09-01 14:00:00 수정 : 2019-09-01 11: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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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9월2일 日 외무장관 시게미쓰, 연합국에 항복 / 시게미쓰, 1932년 윤봉길 의사 의거 현장에 있던 인물 / 폭탄 파편에 다리 맞아 절단… 평생 의족·지팡이 의존 / 맥아더 "日, 서구의 과학지식으로 인간을 노예화" 일갈
서울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에 있는 윤봉길 의사의 동상. 1932년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일본 고위 군인과 외교관 등을 향해 폭탄을 던지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통탄스럽게도 일본은 근대화 과정에서 취득한 서구의 과학 지식을 벼려서 억압과 인간을 노예화하는 수단으로 빚어냈습니다. 표현의 자유, 행동의 자유는 물론이고 심지어 사고의 자유마저 미신에 호소하고 무력을 동원함으로써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지금으로부터 꼭 74년 전인 1945년 9월2일 오전 일본 도쿄 앞바다에 정박해 있던 미 해군 군함 미주리호 갑판에서 연합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가 행한 연설의 일부다. 이날 일본은 미국을 비롯한 9개 연합국에 정식으로 항복했고, 그로써 장장 6년에 걸친 제2차 세계대전이 완전히 끝났다.

 

◆일본 항복 75주년 맞아 대대적 기념행사 열릴 듯

 

미 국방부는 일본 항복일을 뜻하는 ‘VJ 데이’ 75주년이 되는 2020년 9월2일 참전용사 등을 초청해 대대적 기념행사를 열 예정이라고 1일 밝혔다. 미국에서 VJ란 ‘일본에 대한 승리’(Victory on Japan)를 의미한다. 일본이 미국·영국·소련·중국·프랑스·네덜란드·캐나다·호주·뉴질랜드 9개 연합국에 항복한다는 내용의 문서 조인식이 열린 1945년 9월2일을 일컫는다. 1945년 5월8일 독일이 연합국에 항복했다는 의미의 ‘유럽에서의 승리’(Victory in Europe)를 기리는 ‘VE 데이’와 종종 비교된다.

 

1945년 9월2일 일본 외무장관 시게미쓰 마모루(오른쪽)가 고개를 숙인 채 항복 문서에 조인하고 있다. 시게미쓰는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의거 때 다리를 다쳐 평생 의족과 지팡이에 의존했다. 왼쪽은 연합군 총사령관인 미국의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

한국에선 일본이 1945년 8월15일에 연합국에 항복한 것으로 아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매년 8월15일에 ‘광복절’ 기념식을 연다. 엄밀히 말하면 1945년 8월15일에는 일본 국왕이 방송을 통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게 전부다. 정식 항복은 그로부터 18일 뒤인 1945년 9월2일에 이뤄졌다.

 

독일의 경우 총통 아돌프 히틀러가 자살하고 난 직후인 1945년 5월6일 독일군 수뇌부가 미국·영국 등 연합국에 항복 의사를 밝혔고 그로부터 불과 이틀 뒤 프랑스 랭스에서 항복 문서 조인식이 열렸다. 당시 연합군이 독일 영토 전부를 이미 점령한 상태였기에 항복 의사 표명과 정식 항복이 거의 동시에 이뤄질 수 있었다.

 

일본은 독일과 달랐다. 일본이 항복 의사를 밝힌 1945년 8월15일 당시 연합군은 아직 일본 영토 중 오키나와 정도를 점령했을 뿐 수도 도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연합군 총사령관 맥아더 원수가 점령을 위해 도쿄에 입성한 것은 1945년 8월30일의 일이다. 그리고 이틀 뒤 항복 문서 조인식이 열린 것이다.

 

◆항복 문서에 서명하며 만년필을 5개나 쓴 맥아더

 

미주리호 함상에서의 항복 문서 조인식은 일본과의 전쟁에서 가장 결정적 역할을 한 미군의 맥아더 원수가 주도했다. 당시 맥아더 원수는 문서에 자기 이름을 적을 때 만년필을 무려 5개나 이용했다. 서명이 끝난 뒤 5개 중 하나는 미 육군의 조너던 웨인라이트 장군, 다른 하나는 영국 육군의 아서 퍼시벌 장군에게 각각 양도됐다. 웨인라이트와 퍼시벌 두 장군은 역사적인 항복 문서 조인식 당시 맥아더 원수 바로 뒤에 서 있었던 인물들이다.

 

웨인라이트 장군은 미국령 필리핀이 일본군에 함락될 때 마지막까지 현장을 지키다 항복, 일본군의 포로가 됐다가 종전과 동시에 풀려났다. 퍼시벌 장군 역시 영국령 싱가포르가 일본군에 함락될 때 마지막까지 현장을 지키다 항복, 일본군의 포로가 됐다가 종전과 함께 석방됐다. 두 장군을 항복 문서 조인식의 전면에 내세운 것 자체가 일본에 모욕감을 안김과 동시에 ‘복수’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한 조치였다.

 

1945년 9월2일 연합군 총사령관인 미국의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가 자리에 앉아 일본의 항복 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맥아더 원수 바로 뒤에 차려 자세로 서 있는 2명은 미국 육군의 조나단 웨인라이트 장군(왼쪽부터), 영국 육군의 아서 퍼시벌 장군이다.

나머지 만년필 3개 중 1개는 웨스트포인트 미 육군사관학교, 다른 1개는 아나폴리스 미 해군사관학교로 각각 보내져 귀중한 기념물이 됐다. 마지막 만년필 1개는 맥아더 원수의 부인 진 맥아더한테 선물로 주어졌다.

 

패전국 일본을 대표해 항복 문서에 서명한 이는 외무장관 시게미쓰 마모루(1887∼1957)였다. 그는 중국 주재 외교관으로 일하던 1932년 4월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일어난 윤봉길 의사의 폭탄 투척 의거 당시 다쳐 다리를 절단했고, 그래서 항복 문서 조인식 때에도 의족과 지팡이에 의존하며 절뚝거렸다. 비록 일본의 항복을 받는 미주리호 함상에 한국 대표를 위한 자리는 없었지만 윤봉길 의사의 혼(魂)이 갑판 위를 지키고 있었던 셈이다.

 

◆일본 항복 원인은 원폭 투하인가, 소련 참전인가?

 

유럽에서 독일이 항복했을 때조차 연합국 지휘부 사이엔 ‘2차 대전이 끝나려면 아직 멀었다’는 비관적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섬나라 일본을 항복시키는 것이 독일과의 싸움보다 훨씬 더 어렵다고 봤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군이 주력인 연합군이 일본 수도 도쿄가 있는 혼슈섬에 상륙하는 시기는 빨라야 1946년 3월쯤이 될 것이란 전망이 우세했다. 하지만 미국이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하고 소련이 대(對)일본 전쟁 참전을 서두르면서 일본의 항복은 1년가량 당겨겼다.

 

미군은 1945년 8월6일 오전 8시15분 히로시마에 첫 번째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1분도 지나지 않아 히로시마 대부분 지역이 화염에 휩싸였고 약 10만명이 즉사했다.

 

이어 소련군이 1945년 8월8일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이 지배하던 중국 북부 지역을 급습했다. 미군은 1945년 8월9일 이번에는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을 떨어뜨려 약 3만5000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로부터 정확히 6일 만에 일본 국왕의 ‘무조건 항복’ 선언이 나왔다.

 

일본의 항복을 앞당긴 원인을 놓고 영미권 학자들은 당연히 ‘원폭 투하’를, 러시아와 중국 학자들은 ‘소련 참전’을 각각 핵심으로 지목한다. 일본 학계는 예전에는 원폭 투하에 비중을 두다가 요즘 들어선 소련 참전을 더 강조하는 분위기다. ‘종전의 설계자들’의 저자인 일본인 하세가와 쓰요시는 “원폭 투하가 일본을 항복하게 만들었다는 건 미국 중심의 역사 인식”이라며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이 종전의 주역이었다”고 주장했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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