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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민호의문학의숨결을찾아] 역사가 풍경이 되는 통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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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08-16 23:29:54 수정 : 2019-08-16 23:2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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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그녀는 못 만나고 시만 남겨 / 김용익, 영어소설 쓴 특이한 작가

통영까지 하루걸이로 다녀오기 쉽지 않다. 오전 6시 조금 넘어 출발하는 버스를 탔다. 창밖의 풍경이 좋다. 우리의 여름 푸른빛처럼 아름다운 것은 또 없다. 통영은 풍경이 아름다운 곳이다. 누군가는 이곳을 한국의 나폴리라 했다. 나는 이 포구의 풍경을 화가 전혁림의 그림으로 기억한다. 여기서 바라보는 진짜 포구보다 전혁림의 풍경화 속의 통영 포구가 더 진짜 포구 같다고 할까. 통영 포구의 빛깔은 파랗든, 희든, 노랗든 모두 물에 곱게 씻어 놓은 것 같다. 수채화 물감이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 문학평론가

커피 한 잔으로 머리를 깨게 한 후 시장통 거리를 지나 언덕길을 찾아 걷는다. 위쪽으로 올라가니 시인 백석의 일화에 등장하는 명정(明井)마을이 나온다. 해우물과 달우물이 합하여 ‘밝을 명’자 명정마을이다. 평안북도 정주 사람 백석은 통영 여성 박경련을 사모해 이곳 남쪽 ‘땅끝’ 통영까지 내려왔고, 끝내 그녀를 만나지 못하고 시만 남겼다. 나는 그중 ‘통영 1’을 좋아해서 외우기까지 한다. 시의 첫 부분은 이렇다. “옛날에 통제사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의 처녀들에겐 옛날이 가지 않은 천희라는 이름이 많다.” 옛날에 여아들에게는 이름을 주지 않고, 그냥 체니, 체니 하고 불렀다는 것이다. 나중에 여기에 한자를 붙여 ‘천희’(千姬)라고 했으므로 그 이름 가진 여성이 많다는 것이다.

내가 정작 좋아하는 것은 다음 부분이다. “미역오리같이 말라서 굴껍질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이 천희의 하나를 나는 어느 오랜 객줏집의 생선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만났다.” 이 ‘천희’의 사랑이 얼마나 외골수면 사랑 때문에 미역오리처럼 바싹 마르다 못해 끝내 굴껍질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렸겠는가. 객줏집은 객지 손님이 오가는 숙식소다. 여기 마루 틈에 생선가시가 박혀 있었던 것은 내 외갓집 대청마루를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이 대목을 외울 때마다 나는 늘 작가 박경리 선생이 생각나곤 한다. 선생은 이곳 명정마을에서 서피랑 쪽으로 향해 오르다 나타나는 좁은 골목 안 어딘가에서 태어났다. 진주고녀를 나와 해방 즈음에 결혼했는데 6·25 전쟁 중에 남편을 여의고 전쟁 끝나서는 아들까지 잃고, 딸 하나만 키우며 소설을 쓰며 살았다. ‘시장과 전장’이라고, 이런 삶을 그린 장편소설이 있는데, 여기 나오는 여주인공 ‘지영’이 꼭 그렇게 결벽증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통영을 무대로 쓴 소설 ‘파시’에 나오는 여주인공 ‘명화’의 사랑이 바로 그렇게 ‘미역오리처럼 말라서 굴껍질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 사랑이었음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선생은 통영의 근대사를 무대로 또 하나의 장편소설 ‘김약국의 딸들’을 남기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오늘의 행선지는 그 서피랑 아래 통영시립박물관이다. 여기서 김용익 문학과 관련된 일을 하나 해야 한다. 이제야 고백건대 오늘의 여행은 이 일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김용익은 통영 태생으로 영어로 소설을 쓴 특이한 작가였고, 그의 영소설 ‘꽃신’(The Wedding Shoes)은 지금도 한국어로 번역돼 우리 문학 교과서에 실렸기도 한다. 나는 늘 한국어로 쓴 문학이 한국문학의 중심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최근에 와서 약간 생각의 변화가 왔다. 이미륵이며, 서영해며, 강용흘 같은 사람이 1919년 3·1운동 이후 상하이를 거쳐 유럽과 미국으로 가 각각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로 우리 역사를 알리는 소설을 쓴 것이다. 그들은 한국어를 ‘버리고’ 외국어로 소설을 쓴 사람이 아니요, 다른 이의 언어로 한국의 역사와 전통을 알리고 깨우친 것이다. 그 언어가 문학이 될 때까지 그들은 얼마나 힘들었을 것인가. 김용익은 비록 해방 후에 영소설을 썼지만 바로 그들의 후배라고 해야 한다.

일을 마치고 나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시장통으로 가 복어탕과 생선구이를 안주 삼아 막걸리와 소주를 한 잔씩 걸쳤다. 통영은 역사와 전통이 하나의 그림 같은 풍경을 이루는 곳이다. 빗소리를 들으며 허름한 음식점에 앉아 있으려니, 나도 오늘은 통영의 조촐한 풍경의 하나인 것 같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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