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을 한반도에서 중국으로 확대한다면 그런 전쟁은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적과 싸우는 잘못된 전쟁이 될 것이다.”
6·25 전쟁 당시 미국 합참의장을 지낸 오마 브래들리(1893~1981) 육군 원수가 조기 종전을 주장하며 한 말이다. 브래들리 원수는 “중국과 끝까지 싸워 결판을 내고 한반도를 통일시키자”며 버티던 더글러스 맥아더 육군 원수와 격렬히 충돌, 결국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킴으로써 한국 현대사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요즘 미 군부는 브래들리 원수에 대한 추모 열기로 뜨겁다. 그가 초대 합참의장에 취임한 1949년 8월16일로부터 꼭 70주년이 되었기 때문이다.

◆'졸병 장군'에서 미군의 '마지막 원수'로
브래들리 장군은 1915년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했다.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원수), 제임스 밴 플리트(대장), 조지프 맥너리(대장) 등이 그의 동기생이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뛰어든 뒤 브래들리 장군은 아프리카와 이탈리아, 그리고 프랑스 등지에서 주로 독일군과 싸웠다. 유럽 전선에선 아이젠하워 장군이 그의 직속상관이었다. 대전 초기 소장이었던 브래들리 장군의 계급은 독일이 항복할 무렵 대장까지 올라갔다.
브래들리 장군은 조용하고 화를 잘 내지 않는 성격이었다. 온화한 인품으로 부하들의 신망이 두터웠다. 복장도 장군답지 않게 눈에 잘 안 띄는 평범한 모자와 군복을 선호했다. 이에 ‘장군인데도 꼭 졸병(G.I.) 같다’는 뜻에서 ‘졸병 장군(G.I. General)’이란 별명을 얻었다.
15일 미 합참에 따르면 종전 후 미국 국방부는 기존의 육·해·공군 위에 ‘합동참모본부’라는 새 기구를 만든다. 꼭 70년 전인 1949년 출범한 합참의 초대 의장에는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던 브래들리 장군이 임명됐다.
아이젠하워, 맥아더 등 2차 대전에서 큰 공을 세운 다른 장군과 제독들은 1944∼1945년에 이미 별 다섯, 원수로 진급한 바 있다. 브래들리 장군은 애초 원수 계급장을 단 장군과 제독 8명에 끼지 못하고 그냥 대장으로 남았으나 합참의장 재직 중인 1950년 기어이 원수로 진급했다. 브래들리 원수 이후 미군에선 2019년 현재까지 원수가 배출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 브래들리를 미군의 ‘마지막 원수’라고도 부른다.

◆6·25전쟁 확전 놓고 맥아더와 다투기도
이처럼 미국에선 초대 합참의장으로 기억되고 추모되는 브래들리 원수가 한국에선 6·25 전쟁 당시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와 갈등을 빚은 일로 더 유명하다.
1950년 6·25 전쟁 발발 당시 맥아더 원수는 일본 도쿄에 사령부를 둔 미국 극동 총사령관 겸 유엔군 사령관, 브래들리 원수는 미국 수도 워싱턴에 근무하는 합참의장이었다. 전쟁 초반 후퇴를 거듭했던 한국군과 미군은 맥아더 원수가 구상한 인천상륙작전이 크게 성공하며 비로소 승기를 잡는다.
단숨에 서울을 수복하고 여세를 몰아 북진 길에 오른 한국군과 미군 등 유엔군은 1950년 10월1일에는 기존의 38선마저 돌파한다. 이에 중국(당시 중공)은 북한을 도와 싸우기로 결심하고 몰래 전쟁 준비를 시작한다.
1950년 11월 중국의 대대적인 참전으로 6·25 전쟁은 교착 상태에 빠진다. 그러자 미 군부 안에서 논란이 벌어진다. 맥아더 원수는 이 기회에 아예 중국 본토로 전쟁을 확대할 것을 제안했다. 중국과 북한을 굴복시켜 한반도를 한국 주도 아래 통일시켜야 한다고도 했다.
반면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확전을 피하고 싶어했다. 미군이 한반도 전쟁에 발이 묶여 있는 사이 소련(현 러시아)이 서유럽을 공격해 공산화시키는 사태를 우려했다. 합참의장으로서 트루먼 대통령의 핵심 참모였던 브래들리 원수도 같은 의견이었다. 결국 트루먼 대통령은 브래들리 원수의 건의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맥아더 원수를 사령관직에서 해임했고, 6·25 전쟁은 지리한 휴전 협상 끝에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 체결로 일단락된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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