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는 인문학 강의가 인기 없어요. 똑똑한 (인문대) 학생들이 로스쿨을 가려고 하거나 취직과 관련 있는 경제, 경영 쪽 복수전공을 하려 하죠. 그런데 지방자치단체에서 하는 도서관 강의라든지 평생교육원 강의, 기업 초청 강의 등에 나가보면 인문학 열풍을 체감해요. 수십년 간 열심히 일해온 분들이 불현듯 ‘내가 잘 살고 있는 건가’, ‘인간답게 산다는 게 뭘까’란 질문에 부딪히는 거에요.”
교육부 미래교육위원회의 ‘나우미래’ 영상 시리즈 13회 주인공인 김헌(54·사진)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서양고전학)는 이 같이 설명했다. 김 교수는 학생들에게 그리스·로마 신화와 역사 철학 등을 가르치고 있다.
인문학의 위기는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대학가에서 십수년 전부터 흘러나온 얘기다. 김 교수는 “인문학이란 인간답게, 잘 사는 게 뭔지에 대한 고민”이라며 “이런 고민을 하면서 삶을 준비하는 것과 일단 돈을 많이 벌고 안정적인 직장에 들어가는 데만 관심을 갖는 것은 크게 다르다”고 강조했다. 그는 “젊었을 때의 인문학 빈곤이 사회 전체를 각박하게 만들 수 있다”며 우려하기도 했다.
‘나와 우리의 미래, 지금(Now) 그리고 미래’라는 뜻의 나우미래는 교육부 미래교육위가 지난 5월부터 유튜브 채널 교육부TV에 순차적으로 올리고 있는 영상 시리즈다. 미래교육위는 위원들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 시리즈를 통해 앞으로 맞이할 미래와 미래가 필요로 하는 인재, 꿈과 희망 등을 함께 생각해보자고 제안한다. 유튜브에서 ‘교육부 나우미래’를 검색하면 재생목록을 볼 수 있다.

◆고교생 때 부친 여의고 근본적 고민에 빠져
김 교수가 처음부터 서양고전학을 전공한 건 아니다. 사범대에서 불어 공부와 철학 공부를 병행한 그는 고교 3학년 때 부친을 여읜 뒤로 ‘내가 왜 살아있지?’, ‘이 세상은 뭐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심각하게 다가왔다고 털어놨다. 김 교수는 “보고 싶은데 볼 수 없고, 불러도 대답이 없고, ‘나도 언젠가 저렇게 되나?’란 생각이 들면서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불편하고 어색하더라”고 말했다.
대학 2학년 때 한 강의에서 ‘철학은 질문을 던지는 학문이며, 답은 틀릴 수 있지만 질문은 틀리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철학에 매료된 김 교수는 대학 졸업 뒤 고교 불어 교사로 일하던 중 대학원에서 철학 석사 과정에 입학했다. 이후 그는 일과 학업을 병행하기 쉽지 않다는 생각에 교편을 놓고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김 교수는 “프랑스에서는 박사 과정을 함께 밟은 동료 중 상당수가 학위를 딴 뒤 중·고교 교사로 가는 게 가장 인상 깊었다”며 “거기선 교사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역할만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학문 세계를 개척해나가면서 후속 세대를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의식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프랑스 교육 시스템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김 교수는 “교과서가 있는 한국과 달리, 프랑스에선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자기 생각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교육하는 시스템이 있더라”며 “정답이 없는 바칼로레아처럼 입시 체제가 우리와 다른 것도 한 원인인데,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갖고 있느냐가 아니라 사회를 살아갈 때 ‘네 생각’을 얼마나 갖고 있는지를 물어보는 게 가장 큰 차이”라고 부연했다. 그는 이어 프랑스 청년들이 방학 때 아프리카 등지로 자원봉사를 가는 것을 언급하며 “우리나라 학교는 전부 입시·취업 중심인데 거기선 사회의 일원으로서, 지적 엘리트로서 활동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인문의 ‘문’자는 무늬란 뜻… 교육이 중요”
김 교수는 “우리 교육은 앞으로 어떤 기술이 뜰지, 어떤 기술을 가져야 잘 살 수 있을지 이런 쪽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 같다”며 “그런 상황에서는 인문학이 들어설 틈이 많이 없어 보인다”고 교육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이어 “그런데 근본적으로 ‘기술은 인간에게 무엇이어야 하는가’란 질문을 던질 수 있다”며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다면, 기술이 인간에게 재앙이 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인문학에서 ‘문’자는 글월 문(文)을 쓰는데, 원초적인 뜻은 ‘무늬’라고 김 교수는 설명했다. 그는 “인문은 ‘인간이 새겨 넣는 무늬’”라며 “책에 있는 글만 보는 게 아니라 인간이 행하는 모든 것, 밭을 갈고 집을 짓고 그런 것들을 보면서 인간은 무엇이고 인간이 만든 것들이 올바른 것인지 가치판단을 하면서 질문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또 “그리스어에 ‘파이데이아’란 단어가 있는데, 어린이(파이스)를 사람으로 만든다는 뜻”이라며 “서양 문명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에서는 인문학이 ‘사람다움을 가르쳐주는 교육’을 지칭하던 말이었던 것”이라고 소개했다. 즉, 인문은 교육과 통한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인간의 역사라고 하면 계속 사람이 태어나야 하고, 그 사이 사이에 이를 연결해주는 교육이 있어야 한다”며 “교육은 기성세대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걸 전달해준다는 점에서 보수적이기도, 새로운 세대가 앞으로 만들고 싶은 세상을 만들도록 이끈다는 점에서 진보적이기도 하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김 교수는 “우리 교육은 진보적 측면이 부족한 탓에 사회가 정체됐다“고 지적했다.
그가 꼽은 우리 교육의 문제점은 지나치게 입시 위주라 새로운 세대가 마음껏 꿈꾸고 상상할 수 없다는 점이다. 김 교수는 “이런 병폐를 어떻게 바꾸냐하면, 대학을 안 가는 사람도 잘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면 된다”며 “지금은 대학을 나온 사람과 안 나온 사람이 보수라든가 사회적 대접이라든가 사회적 위치라든가, 이런 것들이 너무 불평등하다”고 꼬집었다. 그는 “프랑스나 독일 같은 유럽 국가들에서는 이런 문제 없이 인문학 교육이 잘 이뤄진다”며 “미래 교육은 무엇이 장래에 유망할 것인지에 관한 얘기가 아니라 교육의 보수적이면서 진보적인 두 가지 측면에 충실한 교육이 돼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김주영 기자 buen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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