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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역사 - 7월8∼14일] ‘정화’의 위대하고 무의미한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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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07-07 20:27:25 수정 : 2019-07-07 20:2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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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5년 7월11일 명나라의 정화(鄭和)가 당시로서는 초대형의 함대를 이끌고 원정에 나선 것은 찬탄과 더불어 의혹과 비판을 함께 받아왔다.

중국인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기 무려 90년 가까이 앞서 대항해를 했다며 이를 자랑거리로 삼아왔다. 그 규모도 콜럼버스 선단을 거인처럼 압도했다.

하지만 콜럼버스의 항해는 세계사를 뒤흔들었으나 정화라는 이 고위 환관의 이름은 아는 사람이나 아는 정도다. 더욱이 정화의 원정은 1433년의 7차 원정까지 이어짐으로써 ‘도대체 무엇을 위한 항해였던가?’하는 의문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그런 의문은 당시의 황제인 영락제(永樂帝)의 독특한 위상 때문에 더욱 증폭됐다. 주원장의 넷째 아들로 본명이 주체(朱?)인 그는 원래 현재의 베이징 일대를 다스리는 연왕(燕王)이었으나 난을 일으켜 조카 건문제를 없애고 황위에 올랐다.

그러나 당시 수도였던 난징의 궁궐을 공격해 불 지르고 황제 측근들을 몰살했으나 건문제의 시신은 찾지 못했다. 그래서 이 조카의 행방을 탐색하기 위해 그런 항해를 했다는 주장이 유력하다. 영락제는 건문제를 제거하기 위한 정난(靖難)의 변에서도 공이 큰 정화를 책임자로 거창한 함대를 출범시킨 것이다.

원래 색목인으로 무슬림의 혈통인 정화는 이를 계기로 내관태감이라는 최고위 환관직책과 정씨 성을 하사받았다. 첫 원정에 동원된 함대는 대선 62척을 비롯해 3500척의 배와 병사 2만7800명으로 2년4개월에 걸쳐 오늘날의 캄보디아, 태국, 자바, 수마트라, 실론, 인도를 둘러본 것이다.

정화가 죽은 뒤 그런 함대나 항해가 완전히 사라진 것도 어이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훗날 아편전쟁을 당한 중국이 바다에서 죽을 쑤자 새삼 ‘정화 함대는 무엇을 위한 것이었던가?’하는 탄식이 나왔다.

양평(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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