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최악’이라는 평가를 받는 한·일 관계가 오는 28, 29일 일본 오사카에서 열리는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를 계기로도 개선되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G20 정상회의 기간엔 각국 정상의 양자 회담이 이어지지만, 주최국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우리나라는 양국 정상회담 일정을 결국 잡지 못해 한·일 갈등의 현주소를 여실히 드러냈다. 북핵 대응 등을 두고 일본과 공조를 강화하면서 한·일 양국에 협력을 촉구하는 미국은 난감한 상황이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25일 기자들과 만나 G20 정상회의 기간 한·일 정상회담 개최에 대해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우리로서는 항상 만날 준비가 돼 있지만 일본은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G20 정상회의 기간) 현장에서 일본이 준비돼 만나자고 요청이 들어오면 우리는 언제든지 아베 신조 총리를 만날 수 있다”며 여지를 남겼다.

일본과 양자 회담을 갖지 않는 것은 한·일 관계 악화 신호를 대외적으로 내보내는 의미를 지닌다. 한·일 갈등은 최근 수직 상승하는 모양새다. 지난해 10월 우리 대법원의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판결로 불이 붙은 한·일 갈등은 같은 해 11월 우리 정부의 ‘위안부 합의 파기’ 선언과 12월 일어난 ‘일본 초계기 갈등’ 사건까지 겹쳐 올해 정점을 찍는 추세다.
한·일 관계 악화 상황은 이날 국회 외교통일위에 출석한 강경화 외교부 장관의 강경 발언을 통해서도 확인됐다. 강 장관은 강제징용 배상판결 등과 관련, “일본의 보복성 조치가 나온다면 (우리 정부도) 거기에 대해 가만있을 수는 없다”고 밝혔다. ‘일본 제철이 가진 포항제철 주식의 매각 배당금이 강제집행되면 일본의 보복이 우려된다’는 유기준 자유한국당 의원의 질의에 대한 답변이었다.

이날 외교부가 제출한 ‘북핵 문제와 관련한 현재 상황 및 향후 추진 방향’ 현안 보고자료에서도 한·일 양국의 깊은 골은 확인됐다. 해당 보고서에는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미국과 가용한 모든 외교역량을 집중해 북·미 대화의 조속한 재개를 추진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중국·러시아 등 주요 관련국들과 긴밀한 소통 유지 및 건설적 역할을 지속적으로 독려할 방침”이라는 방안도 소개됐다. 일본이 보고서에서 언급되지 않은 게 눈에 띈다. 일본이 지난해부터 시작된 북핵 협상 과정에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점 등뿐 아니라 냉랭한 한·일 관계가 작용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한·미·일 3국 공조가 약화하는 듯한 모습은 인도·태평양 지역 안보정책의 한 축으로 ‘한·미·일 3각 동맹’을 추구하는 미국의 입장에서 곤혹스러울 수 있다. 전문가들은 대체로 이번 한·일 정상회담 불발에 대해 향후 한·일 관계는 물론 한·미·일 동맹 약화까지 야기할 수 있다며 우려하고 있다.

박원곤 한동대 국제어문학부 교수는 “일본과 정상회담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부정적인 의미가 크다”며 “G20 정상회의는 양국 정상이 정치적인 고려나 국내 반대 여론을 뚫고 만날 수 있는 계기로 삼는데, 이번 기회를 놓치면 양국은 정상회담 개최를 위해 각각 조건을 붙이게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G20 정상회의에서 아베 총리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만나 한·일 관계 악화의 일차적 책임을 한국으로 돌린다면 한·미 정상회담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최강 아산정책연구원 부원장도 “일본과 관계를 안 좋게 가져갈 때 우리가 잃을 게 많은지 일본이 많을지 생각해 봐야 한다”며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할 당시 ‘(일본과) 협력할 것은 협력하겠다’고 했는데, 이 약속이 지켜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일 정상회담 불발엔 우리 측에 못지않게 일본 정부의 ‘의도적 방치’가 원인이기도 하다. 물론 일본의 이 같은 대응엔 우리 정부가 최근 제안한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판결 해법이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우리 정부는 지난 19일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과 관련, “한·일 기업이 위자료를 부담하자”고 제안했다. 청와대는 지난 1월 ‘한국 정부와 한·일 양국 기업이 참여하는 기금 조성’ 방안에 대해 “발상 자체가 비상식적”이라며 검토 불가 방침을 밝혔지만 ‘정부 참여’ 부분을 제외하고 기업들의 ‘자발적 참여’라는 조건을 붙여 양국 기업의 공동 재원조성 방안을 제안한 것이다. 일부에서는 청와대가 한·일 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입장을 바꾼 것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정선형·김달중 기자 linear@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