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시 합격은 출세의 보증수표다. 행정고시(현 국가공무원 5급 공채시험)에 합격하면 5급 사무관 자리가 보장된다. 2017년 폐지됐지만 사법고시에 합격하면 3급 판검사가 될 수 있었다. 고시 합격은 가문의 영광이고 출신 학교·지역의 경사다. 개천에서 난 용이 되고픈 흙수저들이 잡을 수 있는 희망의 끈이었다.
고시합격 수기집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은 고시생들의 필독서였다. 고시 준비가 막연한 수험생들에게 나침반처럼 방향을 제시했고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사법·행정·외무고시를 3대 고시라 했다. 그런데 하나도 붙기 힘든 3대 고시를 모두 붙은 ‘공신’이 7명이나 된다니 혀를 내두르게 된다.
최초는 장덕진 전 농림수산부 장관이다. 고승덕 전 의원은 대학 재학 중 고시 3관왕(사시 최연소, 행시 수석, 외시 차석)에 올랐다. 송옥렬 서울대 로스쿨 교수는 1991년 한 해에 3대 고시 합격 기록을 세워 기염을 토했다. 서울대 첫 직선제 총학생회장 출신인 이정우 변호사도 3관왕이다. 과거 언론 인터뷰에서 “세속적인 출세의 시각으로 보지 말아 달라.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현실을 개선하는 데 노력하겠다”고 했다.
고시 합격 후 연수원에서 비위사실이 드러나 나락으로 떨어진 사례도 없지 않다. 2003년 사법연수원생이 무작위 전화통화로 알게 된 여성을 7년 동안 성폭행하고 폰섹스 통화 내용과 나체 사진을 공개하겠다고 협박해 수천만원의 돈을 뜯어낸 사실이 밝혀져 충격을 주었다. 연수원생이 파면된 첫 사례였다. 2013년에는 결혼을 한 사법연수원생이 동료 연수원생과 불륜 관계를 맺고 그에 충격을 받은 부인이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파면조치를 면하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행정고시에 합격해 연수를 받던 남자 교육생이 지난달 수업시간에 여자 교육생을 뒤에서 몰래 촬영하다 적발돼 퇴학 조치를 당했다. 공무원에 임용되려면 다시 시험을 봐야 한다. 정상에 발을 디뎠다가 실수로 미끄러져 밑바닥으로 굴러떨어진 처지가 됐다. 땅을 치고 후회해본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좋은 두뇌와 좋은 인성은 정비례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김환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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