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명호 서울대 명예교수는 두 사서에 드리워진 지나친 유교사관을 제거하고 역사적 진실을 추적하는 방법론을 제시한다.
따분한 학술서적이 아니다. 조선 초기 세종 앞에서 벌어졌던 열띤 논쟁을 담은 역사 이야기 책이다. 세종과 개국공신들은 고려역사 편찬 과정에서 불거진 고려의 황제제도 기술을 놓고 10여년 논쟁을 벌였다. 정도전, 변계량 등 신료들은 고려의 황제제도가 대명 사대에 어긋난다며 '참의지사'(僭擬之事)라고 비판했다. 분수에 맞지 않게 중국을 모방해 황제를 운운했다는 것. 고려사 기술문제는 고려 왕조를 뒤엎은 조선 개국공신들의 대명사대 존립 근거와 직결되는 중대사였다. 이는 당시 국제 정세에 비춰 다각도로 검토할 필요도 있다. 당시 중원을 통일하고 명을 건국한 주원장은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고 있었다.
이에 막 개국한 이성계 등 집권세력은 국가의 모습도 제대로 정비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명의 비위를 거슬리면 안된다는, 스스로 기는 형국이었다. 일촉즉발의 조선·명 관계는 주원장이 1398년(조선 태조 7년)이 죽으면서 다소 완화되었다.
이런 인식은 세종 31년(1449)부터 3년간 편찬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기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고려 황제제도를 그대로 쓸지, 아니면 고쳐 쓸지(改書)가 논쟁의 촛점이었다. 따라서 얼마든지 실제 역사와는 다르게 기술되었을 개연성도 있다.
노명호 서울대 명예교수는 이 학술서에서 고려사 편찬에 얽힌 논쟁을 자세히 소개한다. 그는 “오늘날 역사학계는 고려사가 객관적인 자료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면서 “오늘날 역사학계는 조선 조정이 술이부작(述而不作), 즉 자료에 따라 서술하고 작문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했다고 평가한다”고 했다. 그러나 “역사학계는 고려사 서술에 적용된 술이부작 원칙의 객관성을 과도하게 평가했다”면서 “이는 근본적으로 수정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당시 고려의 황제제도는 동아시아 독립국가에서 쓰는 일반적인 제도였다. 당시 북방의 큰 세력이었던 금나라는 국서를 통해 ‘고려국황제’로 분명히 칭했다. 명태조 주원장도 고려에 보낸 외교 문서에 고려를 황제국가로 분명히 인정했다.
그럼에도 조선이 개국하면서 고려의 자주성은 소멸되어 버렸다.
조선 초기 조·명 관계는 긴장과 완화를 되풀이했으나, 세종대에 이르러선 긴장감이 상당부분 완화되었다.
이런 국제정세의 흐름을 읽고 있던 세종은 개국공신들의 사대가 너무했다며, 제한적인 직서(直書)’ 논리로 고려사 편찬을 지휘해 나갔다. 반면 신료들의 반발은 극심했다. 변계량 등 편사자 다수는 사대명분론에 투철했다. ‘황제’와 ‘천자’라는 말을 아예 거론조차 못하게 했다. 이에 세종은 수차례 고려사 편찬 작업을 중단했으며, 변계량 등이 죽은 후에야 편찬 작업에 본격 착수할 수 있었다.

노 명예교수는 “고려사에는 고려에서 중요한 구성단위였던 국경 밖의 기마주’(국경 너머에 사는 이민족 집단)에 대한 자료도 거의 사라졌다”며 “고려를 맹주로 하여, 고려의 관작을 받고 팔관회에 참석한 고려 주변국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고 비판했다.
결론적으로 고려사에서 고려 황제제도 등 주체적 기술은 사실상 삭제되었고, 파편만 여기저기에 남았다는 것이 노 명예교수의 판단이다. 이런 결과로 인해 고려 황제제도는 후대에도 부정되었고 의미도 축소됐다는 것이다.
3세기 반 정도에 걸쳐 존속한 황제제도는 고려의 자주성과 고구려의 맥을 잇는 중요한 기제였다. 노 명예교수는 “고려사 편찬 방침에는 조선 전기 지배층의 주자학과 사대명분 이념이 철두철미하게 투영됐다”며 “편찬 방침에 대한 오해는 광범위한 왜곡을 만들었고, 그것은 현재도 진행중”이라고 주장한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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