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사진은 해외입양에 대한 여러 자취 중 우리 국민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기록물 중 하나다. 간단하게 ‘해외입양’이라는 네 글자로 치부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여러 단계에 걸쳐 진행된다. 일단 친생부모가 양육을 포기하고, 이에 따라 친권을 포기하며 입양을 선택하기까지의 과정부터 간단하지 않다. 생이별해야 하기 때문이다. 입양의 절차에 들어서더라도 아이를 양육하기 위해 여러 노력이 투입되고, 아이를 보낼 나라와 입양부모를 선별해야 하며, 이후에는 국적 변경을 위해 양국 법원의 승인도 필요하다. 국경을 넘어가서도 국가에 따라 시민권을 얻기 위한 추가 과정이 필요할 수 있고, 사후관리가 남아 있다. 궁극적으로는 입양아동이 현지에서 잘 적응해 온전한 가정을 얻는 것이 최종목표일 것이다.
최근에야 입양특례법 개정 등으로 인해 입양의 절차가 어느 정도 확립됐지만, 2000년대 전까지만 하더라도 무분별한 입양으로 인해 연간 최대 9000명에 가까운 한국 아동이 영문도 모른 채 국적을 바꿨다. ‘단순히 못 먹고 못 살던 시절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기에는 정부가 너무도 쉽게 아이들을 해외에 내주었고, 그것을 위해 법 개정과 재정적 지원도 아끼지 않은 흔적들이 고스란히 역사 곳곳에 남아 있다.
한국의 이러한 대규모 해외입양의 포문을 열어젖힌 것이 바로 전세기를 통한 해외입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박스에 담겨 비행기를 타고 국경을 넘은 한국 아이는 얼마나 될까? 그 흔적을 되짚어 보자.
◆16년간 전세기 30여회 이륙, ‘2198+α’명이 해외입양돼
13일 홀트아동복지회에 따르면 전세기를 통한 해외입양은 1956년부터 1972년까지 진행됐다. 16년 남짓한 기간 기록에는 총 29회에 걸쳐 전세기가 한국에서 출발해 미국으로 향했고, 여기에 총 2198명 이상의 한국 아이들이 몸을 실었다.
2198명은 확인된 최소 숫자이다. 1958년과 1959년 등에는 전세기는 떴지만 몇 명인지 기록이 아예 남아 있지 않은 경우도 있고, ‘몇 명 +α’와 같이 대략적인 수치만 기록한 경우도 있었다. 어쨌든 2000명이 넘는 아이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고국을 떠났다.

총 29회 중 2회는 미국의 입양부모가 한국으로 아기를 데려가기 위해 단체로 온 경우였기 때문에 실제로 해외입양 전세기는 27회 떴다고 할 수 있다. 전세기가 한 번 뜰 때마다 평균 80여명의 아이가 탑승했고, 가장 많이 탑승한 것은 1959년 5월4일 129명이었다.
입양 중에서도 특히 해외입양은 며칠 만에 뚝딱 이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병에 걸리거나 사망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했다. 기록에 따르면 1958년 7월23일에는 몇 명이 전세기에 탑승했는지는 모르지만, 이 중에 23명의 환아(아기 환자)가 발생했다고 돼 있다. 또 1958년 10월 6일과 1959년 5월18일에 2명이 각각 사망했고, 1960년 4월12일에도 1명이 사망했다.

◆‘싸게 많이 보내기 위해’ 마련된 전세기 해외입양
전세기를 통합 해외입양이 도입된 배경에는 많은 아이를 보내는 것과 비용 절감의 두 목적이 가장 컸다.
인류 역사적으로 해외입양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에서 발생한 대규모의 전쟁고아를 미국으로 이송하기 위해 태동했다고 볼 수 있다. 이전에는 가문을 잇기 위한 양자들이기 형태의 입양 기록만 남아 있다. 대규모 전쟁 난민 중 전쟁고아를 데려가기 위해 미국은 난민구호법 등을 통해 외국인을 받아들이고 국적을 바꾸는 것과 같은 각종 법적 절차를 마련했다. 문제는 이 절차가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 일시적이라는 데 있다. 해외입양의 근거가 되는 법이 일몰되기 전에 많은 아이를 보내야 했던 것이다.
맨 처음 시행된 전세기 해외입양은 당시 미국의 난민구호법 시한이 1956년까지였기 때문에 이에 앞서 12월17일에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시간에 쫓겨 가능한 많은 아이를 보내야 했기 때문에 홀트아동복지회(당시 홀트씨해외양자회)는 미국의 팬암항공사(PAA)와 3만7000달러에 전세기를 띄우기로 계약을 맺는다.
문제는 전세기의 정원이 65명이라는 것. 첫 수송 목표로 97명을 잡은 입장에서는 애가 탈 노릇이었다. 이러한 문제가 어떻게 해결됐을까. 정식 절차를 밟거나 제대로 된 다른 비행기를 빌리는 방식은 아니었다.

◆크리스마스 선물 위한 해외입양?
당시 기록을 살펴보자.
‘난민보호법 폐지를 앞두고 아이들을 몇 명씩 보내는 것만으로 시한을 맞출 수 없었기 때문에 한꺼번에 보낼 방법을 모색했다. 더구나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를 기다리는 양부모들에게 하루빨리 보내주고자 했다. 그런데 신체검사를 통과해서 입양보낼 아이들이 전세비행기의 좌석 수보다 훨씬 많았기 때문에 항공사 총재에게 전화를 걸어 아이들이 모두 탈 수 있도록 부탁했다. 총재는 그 권한을 비행기 조종사에게 부여했다. 그는 수많은 아이들이 우는 모습을 지켜보더니 결국 모두 탑승하도록 허락했다.’
이렇게 해서라도 아이들을 미국으로 보내는 것만이 최선이었을지, 당시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분분한 부분이 있다. 특히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양부모들에게 하루 빨리 아이를 보내주고자 했다’는 부분은 어느 주체의 입장이 가장 우선했는지를 간접적으로나마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65인승 비행기에 평균 80명 이상의 아이들이 탔고, 여기에 아이를 돌보기 위한 의사와 간호사 등 홀트아동복지회 관계자들까지 감안하면 총 100명에 가까운 인원이 매번 전세기에 탑승했다는 것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의 해외입양에 대해 한국에서는 아무런 비판이나 제재가 없었지만, 미국 현지를 비롯한 해외에서는 반발이 거셌던 것으로 보인다. 이 방식은 일단 입양부모가 직접 아이를 인계받는 것이 아닌, 제삼자에게 위탁해 인계를 받는 ‘에스코트’ 방식이었기 때문에 대리입양이라는 이유로 국제적으로 많은 비난을 초래하기도 했다. 이에 미국의 주별로 대리입양 금지법안을 제정하는 곳도 나올 정도였다. 전세기를 통한 해외입양이 자취를 감춘 데에는 이 부분이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
◆해외입양, 먹고살 만해진 뒤 더욱 급증
전세기를 통한 해외입양은 1950년대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이뤄졌다. 이 당시는 한국의 경제발전이 이뤄지기 전인 만큼 ‘해외입양이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에게는 최선이었다’는 명분이 어느 정도 설득력을 얻는다.
문제는 그 이후다. 정말 못 먹고 못 산다는 이유 탓에 갓난아기를 해외로 보내야 했다면, 먹고살 만해진 뒤에는 중단하거나 최소 줄어드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해외입양은 이후 기하급수적으로, 아니 기형적이라 할 만큼 폭증한다. 1960년대 연간 수백명이었던 해외입양아 수는 1970년대 들어 연간 5000명을 돌파했고, 서울올림픽을 3년 앞둔 1985년에 8837명으로 정점을 찍었다. ‘올림픽까지 치르는 나라가 아이를 팔아 돈 번다’며 국제 여론이 극악으로 치달았고, 이를 북한이 대남 비방에 적극 활용하기도 했다. 서울올림픽을 전후해 정부가 ‘입양쿼터제’까지 들고나오며 적극적으로 입양 규모 통제에 나선 것은 이러한 배경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전세기 대리입양은 ‘에스코트 서비스’로 탈바꿈
여행 자율화가 단행된 뒤 전세기를 통한 대리입양은 해외여행객이나 유학생 등을 이용한 ‘에스코트 서비스’ 형태의 대리입양으로 탈바꿈하기도 했다. 민간 입양기관들은 이들에게 비행깃값을 지불하는 대신, 목적지 공항에 나와 있는 입양부모에게 아기를 직접 인계하도록 했다. 입양기관은 에스코트를 한 이들에게 ‘사랑을 실천했다’며 증서 형태로 보증하고, 이에 대해 나름의 수수료를 챙기기도 했다. 입양부모들에게는 비행깃값을 받고, 에스코트 시행자들에게도 수수료를 받는 ‘남는 장사’를 진행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에스코트 서비스에 참여했던 사람들과 사회복지계 관계자들의 전언에 따르면 에스코트 서비스가 횡행하던 시기에는 국제선 비행기가 아이 울음으로 가득 차 외국인 승객의 불만이나 민원이 폭주하기도 했다. 이는 해외의 비난 여론을 더욱 부채질했다. 이 때문에 대통령이 나서서 비행기 한 대당 에스코트 서비스로 보낼 수 있는 아이를 10명 미만으로 제한했다는 믿기 힘든 이야기도 전해진다.
당시에는 유학생이나 배낭여행객들도 비싼 비행깃값을 아낄 수 있는 기회라는 차원에서 많은 이가 응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대가는 혹독했다. 유학생이나 배낭여행객이 대부분이었던 만큼 아기를 키워본 경험이 전무한 경우가 많아서였다. 장시간 아이와 단둘이 비행을 하는 것도 엄청난 부담이었지만, 특히 목적지에 당도해 아이를 입양부모에 인계하는 과정에서의 충격은 평생에 트라우마로 남기도 했다. 불과 몇 시간일지라도 낯선 비행기라는 공간에서 애착이 형성됐고, 아이가 에스코트 인계자와 떨어지지 않기 위해 본능적으로 자지러지는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에스코트에 대해 부끄러워하고 뉘우치며 양심고백하는 이들이 간혹 나오는 것도 이러한 차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해외입양의 역사 모르는 것일까, 외면하는 것일까
어쨌든 해외입양은 계속 감소했다. 그 속도는 생각보다 더뎠다. 2000년대에도 매년 수천 명의 아이들이 해외입양됐고, 2011년(916명)을 시작으로 2010년대에 이르러서야 연간 해외입양이 수백건으로 잦아들었다. 보건복지부의 공식 통계에 따르면 1950년대부터 17만여명의 한국 아이들이 해외입양됐다.
이는 공식 통계이기 때문에 누락된 통계도 많다. 미군정 시절부터 미군 등을 통해 직접 입양된 혼혈아들과 4대 입양기관이 아닌 호주의 펄벅재단 등 다른 법인을 통해 입양된 경우 등까지 더하면 한국의 해외입양아는 20만명을 상회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해외의 사회학자나 인구학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구상에서 진행된 해외입양이 50만건 정도일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들은 역사상 해외입양에서 유독 한국의 해외입양이 절반에 육박하는 사실에 주목하며 놀라워한다. 이 때문에 국제적인 비난이 비등했지만, 대다수의 우리 국민은 이 사실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행여 알고 있는 사람들조차 대부분 믿고 싶지 않아 하거나, 외면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김준영 기자 papeniqu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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