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동대문운동장 터에 들어선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가 올해 개관 5주년을 맞았다. 거대한 우주선으로 불시착한 듯한 DDP는 서울을 넘어 한국의 랜드마크, 세계적인 디자인 허브가 됐다.
세계일보는 DDP를 운영하는 서울디자인재단(대표 최경란)과 협업해 ‘서울의 디자인 이야기’를 12회에 걸쳐 연재한다. 건축과 디자인, 패션 등 DDP와 연관된 분야별 디자인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짚어 본다.
◆패션에 새로운 가치를 더하는 시대
패션은 디자인을 이야기할 때 가장 오래되고 친근한 주인공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수라 할 의식주에서 가장 앞서는 것이 옷, 바로 패션이다. 패션이 추구하는 가치는 무엇일까. 아름다움을 소비하면서 느끼는 행복일까. 최근 패션 앞에 다소 낯선 수식어가 붙기 시작했다.

윤리적 패션, 지속가능한 패션, 슬로(slow·느린) 패션. 많은 사람들에게 아직 생소하지만 지금 세계 패션시장에서는 새로운 유행어다. 좀처럼 패션과 조우하기 어려워 보이는 윤리와 지속가능성 같은 주제어가 화려한 런웨이나 매장에서, 그리고 옷의 태그에까지 빈번하게 등장한다. 또 인권, 환경과 같은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면서도 세련된 디자인과 좋은 품질로 무장한 패션 벤처들에게 전 세계 소비자들이 열광하고 있다.
그들은 패션산업이 야기한 노동 착취, 공동체 파괴, 환경 훼손, 동물 학대와 같은 문제를 패션산업 내부에서 해결하기 위해 디자인에서 원료, 제조, 유통에 이르기까지 제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정적인 영향을 제거하거나 줄여나간다.
개발도상국의 노동 착취, 아동노동을 금지하는 공정무역, 지역의 문화와 장인을 부활시키는 수공예, 디자인 단계부터 버려지는 원단을 최소화하는 제로디자인, 농약이 다량 살포되는 면화 농업의 대안인 유기농 면 생산방식, 제조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로 지구온난화를 일으킬 뿐 아니라 썩지 않는 쓰레기로 버려지는 화학 원단을 거부하고 자연 소재만을 취급하는 친환경 패션 디자인이 활발하다. 페트병이나 폐기된 의류에서 새로운 소재를 만들어내는 재생 원단 의류, 자동차·현수막·소방 호스 등 폐기물을 다시 디자인해 새로운 제품으로 탄생시키는 업사이클(upcycle·새활용) 디자인, 동물 가죽이나 모피를 사용하지 않는 비건(vegan·채식주의자) 패션 등도 윤리적 패션의 지형을 넓혀주고 있다.

◆소비자들이 윤리적 패션에 눈뜨게 만든 ‘패스트 패션’
윤리적 패션은 패션산업의 지도를 새롭게 그려낸 패션계의 거인, 패스트(fast·빠른) 패션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다. 패스트 패션은 마치 패스트푸드처럼 저렴한 가격으로 빠르게 대량 소비시킨다는 의미에서 붙은 별칭으로, 원래는 패션회사가 생산부터 유통까지 직접 책임지는 자가상표부착 방식, 즉 SPA(speciality retailer of private label apparel)를 말한다.
옷을 싸게 만들어 판다는 걸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문제는 옷이 일회용품처럼 돼 버렸다는 데 있다. 2017년 매킨지 보고서에 따르면 옷을 입는 기간은 15년 전에 비해 절반으로 줄었고, 평균 8번만 입고 버려진다고 한다. 그 결과 소비자가 구매하는 의류 수는 2010년 이후 4년간 60%나 증가했고 구매한 지 1년도 안 된 옷 10벌 중 6벌이 소각장이나 매립지에서 짧은 생을 마감하고 있다.
패션산업이 환경에 미치는 악영향도 심각하다. 전 세계 패션산업은 3억7000만대의 자동차가 1년간 배출하는 양에 맞먹는 온실가스를 배출하고 있고, 지금 추세라면 2030년까지 60% 이상 늘어난다고 한다. 가격이 저렴한 합성섬유 옷 하나를 세척할 때마다 1900개 이상의 미세 플라스틱이 강과 바다로 흘러 들어가고 있다.

2013년 1000여명의 목숨을 앗아간 방글라데시의 라나플라자 참사 현장에는 최후의 순간까지 미싱 위를 달리던 패스트 패션 옷들이 뒤섞여 있었다. 안전이 무시된 작업장에서 근로자들이 받은 월급은 고작 34달러. 분노한 수백만 시민들은 옷을 뒤집어 입고 라벨을 가리키며 “누가 나의 옷을 만들었나요?”(Who made my clothes?)란 태그와 함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였고 몇몇 다국적 기업들이 노동조건 개선을 약속하는 문서에 사인하게 만든다. 패스트 패션의 불편함은 빈번히 등장하는 아동노동 착취에서 정점을 찍는다. 노동 개선을 약속한 다국적기업들은 하청공장의 윤리적 기준 강화에 나서지만 이로 인한 생산비용 상승은 분담하지 않는다. 비용 상승 압박을 견디다 못한 개발도상국의 하청공장은 하청에 하청을 주는 방식으로 단가를 맞추고, 여기에 저렴한 아동 노동이 동원되곤 한다. 결국 패스트 패션의 근본 시스템이 바뀌지 않는 이상, 돌고 도는 착취의 연결고리를 끊어낼 수 없다.
◆패션의 건강한 생태계를 만드는 공공의 노력
네덜란드에서는 놀랍게도 환경과 윤리를 고려하는 패션 소기업이 전체 패션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50%를 넘는다. 이는 네덜란드 정부의 강력한 환경 정책과 가치 지향의 소기업을 육성하려는 산업 정책 덕분이다.
미국 뉴욕시는 2017년 ‘지속가능성과 윤리’를 주제로 한 캠페인에 선정된 소기업과 브랜드를 집중적으로 지원해, 윤리적 패션을 선호하는 소비자들이 찾아가는 매력 있는 패션거리를 만들어냈다.
서울시는 윤리적 패션이 성장할 수 있는 생태계 조성을 위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서울 종로구의 서울디자인재단 본관에 윤리적 패션회사들의 공동 입주 공간을 조성하고 컨설팅과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으며, 국내 유일의 지속 가능·윤리적 패션 매장을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 열었다.

◆보이콧과 ‘바이콧’
과거에 소비자들은 아름답고 예쁜 디자인을 선택했다. 그러나 지금은 환경을 오염시키거나 인권 문제가 있는 패션은 보이콧을 당하는 시대다. 그리고 스마트한 소비자들은 윤리적 가치를 지키는 상품을 바이콧(buycott)하고 있다. 거부만이 아니라 긍정적인 가치 소비를 통해 사회를 변화시켜 보자는 것이다.
일단 패스트 패션을 피하는 건 가장 효과적이고 윤리적인 선택이 될 수 있다. 유기농 면 제품 구매도 소비자와 생산자의 건강 보호, 환경 보호에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 전체 섬유 중 30%를 차지하는 면의 경우 농약이 살포되는 유전자변형(GMO) 면이 대부분이다. 유기농 면은 화학 재배에 비해 수질 오염 영향을 98% 줄일 수 있다. 오래 입을 수 있는 유기농 면 티셔츠가 경제적으로도 더 영리한 선택이 될 것이다.
소비자의 대부분이 디지털 채널로 이동하면서 가치 구매를 원하는 소비자를 연결하는 다양한 유통 경로가 열리고 있다.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인권을 존중하고 환경 문제를 최소화하면서도 디자인과 품질도 우수한 브랜드들을 만날 수 있다.

패스트 패션의 숨어있는 라벨을 살펴보자. 제3세계 노동자들을 구조적으로 착취하는 불공정무역 상품을 피하려면 원산지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좋다. 최소한 메인드인코리아를 확인하는 것이 윤리적 소비의 기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개발도상국에 의류를 보내는 건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우간다인 80%, 가나인 90%가 수입된 구제 옷을 입고 있으며, 그중에 자선단체가 보낸 의류 비중이 적지 않다. 그 결과 패션산업의 내수 기반이 붕괴돼 많은 일자리가 사라지고 있다. 케냐의 경우, 섬유산업 일자리가 50만개에서 2만개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동아프리카공동체(EAC)는 지역 제조업 회생과 일자리 창출을 위해 올해까지 중고 의류와 신발 수입을 금지하기로 결의했다. 윤리적 패션이 유행이 되기 위해서는 정중하게 잘 만들어진 옷을 잘 선택해 적게 사고 오래 고쳐 쓰는 게 즐겁고 멋진 일로 인식되는 라이프 스타일의 확산이 필요하다.
어쩌면 패션의 혁명을 위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건 동네 수선가게일지도 모른다. 입지 않는 옷을 본인의 개성에 맞게 수선해 최대한 옷의 수명을 늘리는 것은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상표 뒤에 감춰진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고 사회 변화를 추구하는 윤리적 패션기업의 옷을 입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는 신명품족의 출현을 기대해 본다.
이미영 한국윤리적패션네트워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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