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페인에서 여자로 사는 것은 극한스포츠 같아요.”
최근 스페인 역사상 가장 악명높은 성범죄 판결로 기록된 ‘늑대무리’ 사건 이후 1년, 스페인에서는 여전히 페미니즘 열풍이 꺼지지 않고 있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여성들이 성폭력 방지 대책을 외치며 강도 높은 집회를 계속하고 있다. 이달 말 예정된 조기 총선 등 선거의 최대 화두도 페미니즘이다. 극우정당 VOX 등을 필두로 한 백래쉬(사회 변화에 대한 반발심리)도 비례해서 커졌다.
4일(현지시간) BBC는 이 같은 스페인 여성들의 페미니즘 운동을 “혁명”이라 칭했다. 그 계기가 된 사건은 3년전 스페인 북부도시 팜플로나에서 일어났다. 매년 이곳에서 열리는 황소달리기 축제에서 18세 여성이 5명의 남성들에게 집단강간을 당했다. 남자들은 스스로 ‘늑대무리(the wolf pack)’라 칭하며 10대 소녀를 한 건물 복도로 끌고와 범행했고, 그 과정을 휴대폰으로 촬영까지 했다.
더 큰 충격파는 지난해 4월, 재판부가 이 ‘늑대들’에게 강간혐의 무죄를 판결하면서 터졌다. 촬영 영상을 본 재판부는 “여성이 ‘수동적(passive)’이었다”고 말했다. 현행 스페인 법은 오직 폭행과 위협의 증거가 있어야만 성폭행으로 인정한다.
늑대무리 판결로 여성들은 폭발했다. “말하라”는 뜻의 스페인어 ‘#꾸엔딸로’(#cuentalo), ‘#아닌 건 아닌 거야’(#no es no) 등의 해시태그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달궜고, 해당 사건 판사들의 자격 박탈을 청원하는 서명에 120만명 이상이 동참했다.
판결을 규탄하는 집회에서 수천명의 여성들은 거리를 점령하고 외쳤다. “걱정마 자매여, 우리가 너의 ‘늑대’가 될게.” “폭력이 아니다! 강간이다!”
논란의 판결 이후 지난 1년간 성폭력 문제에 맞서 싸우는 시위는 계속됐다. 한 집회에 참석한 언론인 노에미 로페즈는 “늑대무리 사건 이후 확실히 페미니즘 운동이 폭발했다”며 “사람들은 이제 법과 제도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집회 참가자들은 “스페인은 다른 유럽국가와 달리 유일하게 성폭력적인 법을 가진 나라”라고 입을 모았다.
이러한 노력 끝에 마침내 정부는 성폭력 관련법을 개정하겠다고 밝혔다. 투쟁 끝에 얻어낸 값진 성과였다.
그러나 반대급부로 성장한 반대 여론, 백래쉬도 거세다. 페미니즘을 나치에 비유하는 극보수 단체들이 등장했다. 극우정당 복스(Vox)는 최근 부상한 반페미니즘의 가장 대표주자로 ‘성폭력 방지법’에 반대표를 던졌다. ‘남성 역차별’이라는 이유에서다. 복스는 “스페인 페미니스트들은 모든 남자를 범죄자 취급한다”고 매번 주장한다. BBC는 복스에 대해 “유럽의 여타 극우 정당과 달리 여성을 상대로 전쟁을 선언하기까지 한 곳”이라고 전했다.
복스의 국제관계 담당인 이반 에스피노자는 “남자들이 결백을 증명하지 못하는 한 언제나 유죄라고 추정하는 것은 명백한 역차별”이라며 “모든 사람은 똑같은 법적 권리를 제공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BBC는 이 같은 주장의 괴리를 보여주는 스페인의 여성 대상 범죄 실태를 보도했다. 지난해에만 47명의 스페인 여성이 부모 혹은 배우자에게 살해당했다. 2017년은 최악의 해로 기록된다. 대략 16만명의 여성들이 가정폭력에 신음했다.
가정폭력 피해자 마리나는 “남편이 내게 화상을 입히고 모욕하고 성폭행하고 상해를 입혔지만 경찰에 신고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며 “사회는 피해자를 손가락질하고 법과 제도가 피해자를 이해해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경찰서에서도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를 앞에 놓고 범죄 발생 가능성을 평가한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법적 헛점이 존재하는 한 여자가 성폭력 등의 신고를 하는 것조차 아직은 쉽지 않은 실정이라는 얘기다.
정지혜 기자 wisdom@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