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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상처 딛고 사랑을 향해 달려가는 여성의 서사

입력 : 2019-04-05 01:00:00 수정 : 2019-04-05 09: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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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미 작가 경장편 ‘어제는 봄’ 펴내 / 현대문학 ‘핀 시리즈’ 열두 번째 작품

깊이 각인돼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생의 트라우마는 어찌 극복할 수 있을까. 글쓰기라는 행위의 이면에는 이처럼 절대적인 상처가 아니더라도 결핍을 호소하고 채우기 위한 치유의 기능이 담겨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현대문학’에서 의욕적으로 출간하고 있는 ‘핀 시리즈’ 열두 번째 작품으로 최근 선보인 최은미(41∙사진) 경장편 ‘어제는 봄’은 생의 한때 들씌워진 질긴 포박에서 벗어나 사랑을 향해 달려가는 여성의 서사가 생생하게 전개되는 소설이다.

경기도 외곽 아파트단지에 사는 서른아홉 살 주부 정수진은 10년 전 등단을 했지만 어디에서도 청탁을 받지 못하는 저주 속에서도 장편 집필에 매달리는 ‘유령작가’의 처지다. 그녀가 소설 취재를 위해 같은 동네 경찰서에서 만나는 이선우 경사. 이 남자와 자연스럽게 소통하지만 정수진은 스물세 살 때 알게 된 엄마의 ‘죄’와 그로 인한 아버지의 자살이라는 깊은 상처로 인해 벽에 부닥친다. 소설 취재를 위해 만나는 차원에서 점차 서로의 아픔을 내보이는 단계로까지 나아가면서 오히려 정수진은 마음의 문을 닫고 만다.

 

“이선우는 알고 있었다. 내가 멈추지 않고 자신한테 직진해 갈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날 새로 알게 된다. 내가 스스로의 행동에 대해 갖게 될 생각이 일반적인 수준의 죄책감을 벗어난 것임을. 이선우 자신을 사랑하게 되는 순간 내가 분열되어버릴 것을, 몸을 갈라버릴 수도 있는 혐오와 증오를 안은 채 자폭할 것을, 그래서 자신 또한 같이 찢겨 나갈 것이라는 걸 알아버린다.”

 

그녀가 증오하던 엄마의 행위를 대를 이어 자신이 답습하게 될 때 스스로 분열되어 폭발하고, 그 화기에 상대방까지 타버릴 수 있음을 그 남자도 알게 됐을 거라고 짐작하는 상황에서 스스로 마음의 창에 블라인드를 내리는 국면이다. 정수진의 어린 딸 또한 그 검은 괴물을 선험적으로 예감하고 울지만, ‘내 과거를 들추고 내 아이를 해치러 온 그것’과 정면으로 맞서는 그녀의 행위야말로 작가가 설정한 득의의 장면일 터이다. 

검은 형체의 괴물을 처치한 사람은 그녀 자신이 아니지만 적어도 그 괴물을 향해 자신을 투척함으로써 새로운 생으로 도약할 수 있는 전기를 만들었다는 차원에서 누가 그 괴물을 제거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이제 비로소 그녀는 ‘타는 듯한 6월의 햇빛’ 아래 자신을 포박해온 포승줄을 녹이며 순한 삶을 향해 달려나가는 연습을 시작할 수 있다.

 

“나를 극복하고 너에게 가는 길은 이렇게도 멀어서, 나는 여전히 매일매일 … 니가 나를 기다리던 곳으로, 힘을 다해 달려 나간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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