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실을 말해도 처벌받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최근 '미투(나도당했다) 운동'에 동참한 이들이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로 역고소를 당하는 사례가 잇따르면서 논란이 재점화하는 모습입니다.
규정 존재만으로 피해자들을 심리적으로 위축시켜 표현의 자유를 제약한다는 지적입니다.
하지만 표현의 자유 못지않게 개인의 인격권, 사생활의 자유 역시 보호받아야 한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습니다.
사생활 보호법이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폐지할 경우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규정만으로도 심리적 위축…폭로 망설이는 피해자들
우리 형법 제307조 제1항, 제2항은 "공연히 사실을 적시하여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설령 폭로 내용이 사실이어도 수사기관이 '사실적시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를 적용하면, 폭로자가 처벌당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미투 운동뿐만 아니라 부패와 같은 내부고발자 등 공익적 목적의 폭로가 위축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실제 미투 운동 초기 당시 가해자들이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경우 되레 폭로자가 처벌당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었는데요. 임금체불을 고발한 경우에도 처벌받을 수 있습니다.
법학계에서는 현행법과 기존 판례에서도 공공의 이익이 있는 폭로의 경우 사실적시 명예훼손의 위법성이 조각된다고 보는 점 등을 고려해 사실적시 명예훼손 처벌 조항의 폐지를 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이례적으로 사실적시 명예훼손을 처벌하는 것은 유교 사상으로 인해 문화적으로 명예라는 것을 보호해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미투 등 폭로가 있을 때 이같은 조항으로 인해 가해자는 도덕적 책임만 지고, 실제 처벌은 폭로자가 받는 경우도 있는데요.

그렇다 보니 결국 아무도 폭로를 하지 않게 공산이 큽니다.
사법부도 사실적시 명예훼손은 유죄로 볼지언정 벌금형이나 기소유예·선고유예로 판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만 참고인들이 진술을 꺼릴수록 폭로자는 폭로 내용이 사실임을 스스로 입증해야 하는 책임이 커져 정신적으로 상당한 고통을 겪곤 합니다.
그렇다면 해외에선 명예훼손죄를 어떻게 다루고 있을까요?
명예훼손을 형법상 범죄로 처벌하는 나라는 극히 일부입니다.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스위스, 일본 등은 사실적시 명예훼손 처벌규정이 있지만 적시된 내용이 사실인 경우 처벌을 면할 수 있는 규정을 두고 있습니다.
유엔(UN) 총회 산하 유엔인권이사회, 인권조약기관인 자유권규약위원회와 여성차별철폐위원회 등을 포함해 다수의 국제인권기구가 지속적으로 우리 정부에 명예훼손 행위에 대한 형사적 처벌을 철폐할 것을 권고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개인의 인격권, 사생활의 자유 보호받아야” 반론도 적지않아
다만 반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사실적시 명예훼손 폐지는 시기상조라는 것인데요.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는 범죄 가해자를 보호하기도 하지만, 범죄 피해자를 보호하기도 합니다.
만약 폐지될 경우 개인의 인격권과 사생활을 보호할 수 있는 근거가 사라질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습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형법상 명예훼손죄의 개정 논의와 쟁점' 보고서를 통해 "우리나라의 경우 프라이버시에 대한 확립된 개념 정의나 사생활권 침해를 규율하는 형사처벌 규정이 없고, 민사소송도 활성화돼 있지 않다"며 "제반 여건 개선 없이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삭제하는 문제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 형법 제310조는 '제307조 제1항의 행위가 진실한 사실로서 오로지 공공의 이익에 관한 때에는 처벌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는데요.

미투 등 공익적 목적으로 사실을 말한 사람들이 구제받을 수 있는 장치가 있는 상황에서 무작정 폐지는 섣부르다는 지적입니다.
특히 한국처럼 IT·통신 기술이 발달한 나라는 빠른 인터넷 속도로 명예훼손이 단시간 내 확산합니다. 한번 침해된 명예는 회복하기 어려운 경우가 허다합니다.
물론 피해구제에 대한 법 제도가 있지만 반론과 삭제가 쉽지 않습니다. 한 통계를 보면 사이버명예훼손은 1년 새 15.1% 증가할 정도로 고통받는 사람도 적지 않은 실정입니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양형기준에서 제외…인터넷 명예훼손, 최대 45개월 징역형 ‘가중처벌’
사실관계 명예훼손죄를 처벌하는 규정을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미 오래 전부터 제기되어 왔습니다.
금태섭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없애는 내용의 형법 개정안을 발의한 바 있습니다. 같은 당의 한정애 의원도 최근 비슷한 내용의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는데요.
고소 당한 자가 자신의 무죄를 증명해야 하는 형사처벌 규정 대신, 명예를 훼손당했다는 쪽에서 손해를 입증하는 민사적 책임을 강화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습니다.
서울지방변호사회가 변호사 1944명을 상대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도 절반이 명예훼손 폐지에 찬성했는데요.
다만 민사 소송에만 맡길 경우 오히려 법률적 대응이 어려운 약자가 명예훼손 피해에 더 노출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습니다. 미투 문제에서도 성폭력 가해자 측이 피해자의 개인적 이력을 공표해 또 다른 의미의 ‘2차 피해’를 낳을 여지도 있습니다.
법률 개정 문제는 차분히 논의하되, 당장 미투 피해자들이 노출돼 있는 피소 부담을 줄여주고 위축되지 않도록 지원하는 게 시급하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인터넷 등 정보통신망을 이용한 명예훼손 범죄는 일반 명예훼손보다 가중처벌하는 양형기준이 마련됐습니다.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지난 25일, 제93차 전체회의를 열고 정보통신망을 이용한 명예훼손죄를 최대 징역 3년9개월 형에 처하는 내용의 양형기준을 의결했다고 밝혔습니다. 의결된 양형기준은 7월부터 시행됩니다.
신설 양형기준은 인터넷 등 정보통신망으로 허위사실을 적시해 타인의 명예를 훼손한 경우 가중 양형범위를 징역 8개월~2년6개월로 설정했는데요.
범행수법이 매우 불량하거나 동종누범인 경우 등 가중사유가 2개 이상 있을 경우 양형기준상 가중형량에 추가로 50%를 더해 선고할 수 있습니다. 정보통신망 활용한 명예훼손의 경우 징역 2년6개월의 1.5배인 징역 3년9개월까지 선고가 가능합니다.
기존 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죄의 가중 양형범위는 징역 6개월~1년6개월로 추가 가중처벌해도 최고 징역 2년3개월까지만 선고가 가능했는데요.
양형위원회 “정보통신망 이용 명예훼손은 전파 가능성이 높아 피해가 크고 피해회복이 어렵다는 점을 고려해 일반 명예훼손보다 가중처벌하기로 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어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는 징역형 선고비율이 낮아 양형기준 설정요청이 실무상 그리 높다고 볼 수 없는 반면, 이에 대한 비(非)범죄화 요구가 높은 상황을 고려해 양형기준을 설정하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김현주 기자 hj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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