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의 발’ 지하철의 고단함을 잊게 해줄 미술관을 기대하며 지하로 지하로 내려왔다. 그러나 지하철역은 어쩔 수 없이 지하철역이었다. 14일 서울시와 서울교통공사가 지하철 6호선 녹사평역에 문을 연 ‘녹사평역 지하예술정원’은 절반의 성공이었다. 무미건조한 지하철역을 일상 속 예술을 향유할 문화명소로 만들겠다는 시도는 의미 있었다. 시민들도 환영하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공공미술 작품들은 공간에 녹아들지도, 주변을 압도하지도 못한 채 역사 곳곳에서 어색하게 맴돌았다.
◆지하철역 한계 뛰어넘지 못한 예술정원
‘녹사평역 지하예술정원’은 지하철 6호선 녹사평역의 지하 1∼5층을 예술공간 겸 식물 정원으로 탈바꿈시킨 프로젝트다. 6개의 예술작품 창작·설치와 환경 개선 등에 24억원의 예산이 투입됐다. 기대가 커서였을까, 밑바탕의 한계였을까. 녹사평역 지하예술정원은 ‘예술’보다는 ‘지하철역’의 정취가 더 강하게 느껴졌다.
미술관이 눈을 사로잡는 데는 널찍한 벽, 작품을 위해 고르고 고른 조명, 은은한 음악이 큰 몫을 한다. 그러나 지하철은 미술관과 다르다. 구석구석 생활의 냄새가 진득하게 눌러붙어 있다. 기능성이 우선시된 무미건조한 마감재, 파리한 전등 빛이 끊임없이 이곳이 지하철역임을 웅변한다. 출퇴근의 고단함, 익명의 군중이 주는 막연한 피곤함이 연상되며 빨리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만 올라온다. 지하예술정원은 지하철역의 이런 태생적 한계를 지우거나 다른 차원으로 바꾸지 못했다. 물론 주말에 낮잠 자기 바빠 미술관 나들이를 미룰 수밖에 없는 대다수에게 지하철 예술정원은 존재 자체로 의미 있을 수 있다.
일단 지하 1층으로 내려가면 유리 돔 아래 정중앙에, 서울시 표현에 따르면 ‘얇은 메탈 커튼’이 달려 있다. 국제 공모를 통해 당선된 일본 작가 유리나루세, 준이노쿠마의 ‘댄스 오브 라이트’다. 서울시는 이 작품을 “천장 유리돔을 통해 들어오는 태양빛을 반사, 역사 내부를 시시각각 변하는 빛을 담아내는 거대한 캔버스로 만든다”고 묘사했다. 그러나 이런 환상적 효과보다는 거대한 새장이 연상됐다.
본격 전시는 지하 4층에서 시작된다. 김아연 작가의 ‘숲 갤러리’는 남산 소나무 숲길을 나무 기둥 수십 개로 재구성했다. 조소희 작가의 ‘녹사평 여기…’는 녹색 식물이 모여사는 풍경을 139장의 알루미늄 와이어 뜨개질로 구현해 천장에 늘어뜨렸다.
정진수 작가의 ‘흐름’은 끊임없이 이동하는 시민과 자연의 변화를 파노라마 스크린에 영상으로 대비시켰다. ‘담의 시간들’은 용산기지 담벼락에 남은 시간의 흔적, 6·25전 총탄 흔적이 남은 용산공원의 벽 등을 탁본해 12개 화면에 담았다. 김원진 작가의 ‘깊이의 동굴- 순간의 연대기’는 기억의 지층을 비유한 작품으로, 색연필의 따뜻한 색감을 활용했다.
지하 4층 정원에는 600여개의 화분 식물이 자라고 있다. 시민정원사들이 상주하면서 화분을 가꾸고 시민과 함께 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할 예정이다. 이 외에도 지하 1·4층에 갤러리와 세미나실이 마련돼 있다.
녹사평역 지하예술정원은 서울시 공공미술 프로젝트인 ‘서울은 미술관’의 하나다. 2000년 문을 연 녹사평역은 원래 서울시청 이전과 환승 노선을 염두에 두고 대규모로 지어졌다. 돔형 구조인 이 역은 천장에 반지름 21m의 유리 돔이 있어 자연광이 그대로 들어온다. 그 아래로는 둥근 홀이 35m 깊이로 이어진다. 민간 건물의 지하 11층에 해당하는 깊이로, 승강장까지 더하면 지하 12층 규모에 달한다.
◆“미술관보다 미술관의 경험에 중점 둬”
지하예술정원에 대해 이재준 전시기획자는 “제일 중요한 것은 작품이 앞에 나서서 ‘나 여기 있소’ 하고 자기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 공간 속에 녹아들어서, 공간을 변화시키고 그 안에서 시민들의 감각·감정·경험을 변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며 “요란한 조각 작품, 거창한 벽화를 기대한다면 전체 방향과 어긋난다”고 설명했다.
지하역사와 예술작품이 자연스레 융화되지 않는다는 지적에는 “지하철 공간이기 때문에 시민들을 이해시키려는 작품보다 시민이 잠시 멈춰서 ‘이런 예술작품이 있구나’ 보는 순간들, 그 순간들을 통해서 조금의 쉼과 여유를 갖고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주면 좋겠다하는 범주에서 예술작품을 설치했다”고 밝혔다. 이 기획자는 이어 “미술관을 만들려했다기보다, 미술관에서 할 수 있는 경험을 가져다주려 했다”며 “작품에 들인 1년 여의 시간과 노력, 앞으로 시민들이 얻어갈 부분을 감안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날 녹사평역을 찾은 시민들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용산구 이태원에 거주하는 손모(77)씨는 “대한민국 국민을 위해 나라에서 신경을 쓰는 것 같아 고맙다”며 “만남의 장소로서 누군가를 만나는 막간에 둘러볼 수 있고 아름다운 나무도 많아서 좋다”고 말했다. 이어 “살아가는 게 너무 각박한데 이런 쉼터를 통해 조금이라도 사람들 마음이 유해졌으면 좋겠다”며 “외국인도 많이 찾는 역이라 한국에 대해 좋을 인상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마포구에 사는 40대 양모씨는 “모임 회원이 홍보물을 보고 여기서 모이자고 해서 일부러 왔다”며 “어디에 전시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만, 지하철역에 식물이 많으니 정말 좋다”고 밝혔다.
시는 녹사평역 공공예술 정원 개장과 함께 역부터 용산공원 갤러리까지 도보 투어하는 ‘녹사평 산책’ 프로그램을 이날부터 시작한다. 서울시 공공서비스 예약 홈페이지에서 누구나 신청할 수 있다.
이날 시와 서울교통공사는 박원순 서울시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개장식을 가졌다. 개장식에서 박 시장은 “예술이 살아숨쉬는 도시가 되려면 공식적인 박물관이나 미술관이 아니라 시민 삶 속에서 체험하고 향유할 수 있는 예술이 중요하다”며 “일상에서 예술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을 계속 만들어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송은아 기자 se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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