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광주서… 제주서… 강원 홍천서…/ 1919년 4월2일 통영의 만세운동때/ 기생 국희, 재산 털어 태극기 만들어 100년 전 오늘, 바야흐로 한반도 전역에서 불길이 타오를 만세운동의 서막이 올랐다. 역사학자 박은식이 기록한 3·1운동의 규모는 ‘3월부터 5월까지 집회 수 1542회, 참가자 202만3098명,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만5961명, 체포된 사람 4만6948명’에 이른다. 기미년 오늘부터 시작해 전국으로 퍼져나간 이 독립운동의 불쏘시개 역할을 한 주역 중에는 청소년들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알려진 유관순 열사만 해도 그해 만 17세였다.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놀란 일제 당국이 일제히 휴교령을 내리자 학생들이 전국 각지 고향으로 내려가 불을 옮겨 붙인 셈이다.
“나는 비록 한 팔을 잃었지만 남은 팔로 만세를 외칠 것이다. …내 이름은 윤혈녀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피를 흘려서 ‘혈녀’라는 이름을 얻었다.”
전라도 광주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0일 일어났다. 광주 시위는 숭일학교와 수피아여학교 교사와 학생 등 개신교에서 적극적으로 주도했다. 시위대 선봉에 섰던 수피아여학교 학생 윤형숙은 일본 기마 헌병대 대장이 칼을 높이 치켜들어도 결기 가득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고, 한쪽 팔을 잃자 잘린 왼쪽이 쥐고 있던 태극기를 오른 손으로 집어들고 다시 외쳤다. ‘폭동’의 배후를 묻는 법정에서는 “배후는 2000만 조선 동포들”이라고 단호하게 말했고, 자신의 이름은 ‘혈녀’라고 답했다. 작가 정명섭은 ‘피로 새겨진 이름, 윤혈녀’에서 윤형숙의 사연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좌측부터 정명섭, 신여랑, 이상권 |
좌측부터 박경희, 윤혜숙 |
1919년 3월 29일 경기도 용인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은 이상권이 ‘봄바람 스치는 남바위를 쓰고’에 담아냈다. 주민들이 이불 홑청을 뜯어 태극기를 만든다거나, ‘남바위’라는 전통 모자를 주요 상징으로 동원해 만세에 참여한 농민 정서를 보여주는 점이 특징이다. ‘통영의 꽃, 국희’를 집필한 박경희는 1919년 4월 2일 경상도 통영에서 전개된 만세운동 당시 기생조합 소속이던 이국희와 정홍도에게 각광을 비추었다. 기생이었던 이들은 집안 빚을 갚기 위해 어렵사리 모은 재산을 털어 태극기 만드는 자금으로 기부하고 헌신적으로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법정에서 판사가 왜 기생 신분에 걸맞지 않게 독립운동을 했느냐고 힐난하자 되쏘는 답변.
“저의 본남편은 조국입니다. 기생도 나라를 사랑하는 백성입니다. 그래서 목숨 걸고 만세운동에 나섰습니다.”
이 소설집을 제안한 윤혜숙은 강원도 홍천에서 1919년 4월 3일 일어난 만세운동을 ‘끝나지 않는 아침’에 풀어냈다. 마방을 운영하던 노동자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실존 인물 김덕원과 마방 일꾼인 소년 유근의 이야기가 중심이다. 김덕원은 만세운동에 참여하지 않으면 거금의 벌금을 내고 지역에서 쫓겨날 것이라고 짐짓 을러대는데, 이는 사실 체포됐을 경우 책임을 자신이 지려는 명분 제공용 고육책이었다. 소설이 아니면 살려낼 수 없는 세목 중 하나다.
이 책 말미에는 “우리는 오늘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며, 조선인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하고 “우리는 이를 세계 모든 나라에 알려 인류가 모두 평등하다는 큰 뜻을 분명히 하고, 우리 후손이 민족 스스로 살아갈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게 할 것”이라고 천명한 ‘쉽고 바르게 읽는 3.1독립선언서’도 붙여놓았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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