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는 창의성의 가치에 매우 익숙해 있지만, 인류 역사에서 그것은 오랫동안 생소한 것이었다. 근대에 창의성의 개념을 유난히 발달시켜온 서구에서조차 창의성은 인류 문화사의 막내 동생쯤 되는 것이다. 서구 문화의 원천이라는 고대 그리스에서는 창조 또는 창조자라는 말에 해당하는 용어가 없었다. ‘만들다’라는 표현으로 충분했다. 특히 화가와 조각가들의 행위는 자연을 ‘모방하여 표현’한다는 ‘미메시스’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중세에 이르러 창조라는 표현을 썼지만 그것은 ‘무(無)로부터’ 창조하는 신의 행위를 가리킬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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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석 철학자 |
이제는 ‘창의성 스트레스’라도 나올 법한 상황인데, 그렇다고 창의성을 포기할 수도 없다. 역사를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문화의 복잡함 없는 평온한 자연의 상태를 원한다면, 왔던 길을 다 돌아가야 한다. 원시의 굴로 돌아가야 한다. 반면 현대인들이 창의성에 가치를 두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 삶의 지평선을 확장시킨다고 믿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이유도 있다. 삶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도 창의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복잡한 문제일수록 창의적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역사의 길을 되돌아가기보다 긍정적으로 앞으로 나아가려면 창의성을 길러야 한다. 다행히도 창의성은 선천적이기보다 기를 수 있다는 것이 최근까지의 연구 결과들이 동의하는 바이다. 철학자들이 이론적으로 알고 있던 것을 뇌과학자들이 실험을 통해 증명한 바에 따르면, 아주 다른 것들을 서로 연결하는 능력이 창의적인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는 것이다. 창의적 발상의 순간에는 평소 신경 신호를 주고받지 않던 멀리 떨어져 있는 뇌의 영역들이 서로 신호를 주고받는 현상이 벌어진다. 융복합 연구를 강조하는 현대 공학에서 ‘창조력은 전혀 다른 둘 이상의 영역을 융합해 새로운 아이디어로 구현해내는 것’이라고 정의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이를 좀 더 보편적으로 말하면 ‘다름’을 포착하고 수용하려는 노력과 능력이 창의성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창의성 개발은 수많은 다름의 세계, 곧 다양성의 세계를 전제한다. 따라서 창의력을 키우는 것은 일상적 습관과도 연관되어 있다. 인간의 삶은 우리가 의도적으로 배제하지 않는 한 무수히 다른 것들로 다양하게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것들과 긍정적으로 함께 하는 삶에 익숙한 아이들과 젊은이들이 창의적 인재로 성장할 수 있다.
그런데 아직 새해 벽두이니 우리 삶을 반성해보자. 우리는 일상적 삶에서 뭔가 다른 것들을 이유 없이 싫어하고 배제하려 하지 않았는가. 자식 교육에서조차 남들이 다 하는 것을 안 하면 불안해하지 않았는가. 일상적 삶의 미시적 반성이 인류 문화의 거시적 성취를 위한 실마리이다. 이러한 반성 또한 새해를 창의적으로 시작하는 방법이 아닐까.
김용석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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