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8월 경북 고령의 A병원에서 한 내과의사가 80대 환자가 휘두른 흉기에 복부 등을 찔렸다. 환자는 혈압 조절이 힘들다며 갑자기 흉기를 꺼내 들었다. 같은 달 광주의 한 치과의원에서도 의사가 환자의 흉기에 찔렸다. 2009년에는 그 해에만 의사와 간호사 등 비뇨기과 의료진 4명이 같은 변을 당해 숨졌다.
의료진에 대한 폭행은 정신과에서만 발생하는 게 아니다. 강북삼성서울병원 임세원 교수 사망사건으로 정신질환자를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거나 정신과에만 국한된 대책을 내놔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지금까지 의료진 폭행은 일부 사례만 알려졌을 뿐 정부 차원의 실태조사가 이뤄진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응급의료법만 해도 응급실에서 발생한 폭행 관련 통계 수치를 통해 사안의 심각성이 드러나 지난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반면 함께 상정된 의료법 개정안은 또다시 계류됐다.

3일 보건복지부와 더불어민주당에 따르면 정부와 여당은 ‘안전한 진료환경 구축을 위한 태스크포스(TF)’를 각각 구성하기로 했다.
복지부 관계자는 “대한의사협회, 대한병원협회 등과 긴급 간담회를 열고 TF 발족에 합의했다”고 밝혔다. 더불어민주당도 임 교수 사건의 재발 방지를 위한 법 개정을 추진하기로 하고 당내 TF를 구성해 후속대책을 논의하기로 했다. 응급실뿐만 아니라 진료실 폭행에 대해서도 처벌을 강화하고 중증 정신질환자에 대한 관리·감독 방안 등을 검토할 예정이다.
정부는 의료현장에서 발생한 폭행사건 건수와 유형, 안전장치 여부 등에 대한 실태조사에 나서기로 했다. 홍정익 복지부 정신건강정책 과장은 “의료진 보호를 위한 의료법 개정안이 국회에 올라갔어도 실태조사를 기반으로 한 객관적 근거가 부족하다보니 동력을 얻지 못했다”며 “앞으로 의료기관과 협력해 조사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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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 골절로 지난해 7월 1일 오후 9시30분쯤 전북 익산의 한 병원 응급실을 찾은 A씨(46·가운데)가 의사 B(37)씨를 폭행하는 장면이 찍힌 폐쇄회로(CC)TV 캡처 화면. A씨가 갑자기 의사의 얼굴을 팔꿈치로 가격한 뒤 바닥에 쓰러지자 머리채를 움켜잡고 욕설을 퍼부은 뒤 발로 걷어차는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다. 대한의사협회 제공 |
응급실만 하더라도 경찰이 접수한 폭행 건수와 유형 등이 조사돼 있지만 의료기관 전체를 대상으로 한 자료는 아직 없다. 그 동안 학계와 의료계에서 일부 의료진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결과만 내놨을 뿐 정부 차원의 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국회에 상정된 의료법 개정안의 핵심은 ‘반의사불벌(피해자가 원하지 않으면 가해자를 처벌하지 않는 것) 조항 삭제’다. 이 조항이 사라지면 의료기관에서 폭력을 저지른 가해자는 피해자와 합의 여부와 관계 없이 수사받는다. 살인 등 강력사건이 아니라 병원에서 고함을 지르는 등 소란을 피운 것에까지 강력처벌하려면 병원 내 폭력이 얼마나 심각한지, 다른 환자에게 얼마나 피해를 주는지 등에 대한 근거가 뒷받침돼야 한다.
박종현 의협 대변인은 “강력 사건뿐만 아니라 폭언, 멱살잡기, 간호사에 대한 성희롱 등 알려지지 않은 의료기관 내 폭력은 정말 심각하다”며 “반의사불벌죄가 없어지면 인식 개선이 이뤄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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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래 진료환자가 휘두른 흉기에 숨진 고(故) 임세원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의 빈소가 마련된 종로구 서울적십자병원 장례식장의 3일 오전 모습. 연합뉴스 |
한편 경찰은 이날 강북삼성병원을 압수수색해 피의자와 관련한 자료를 확보했다. 경찰은 피의자 박모(30)씨가 언제부터 이 병원에 다니기 시작했는지, 어떤 진단명으로 어떤 치료를 받았는지 정확한 사실관계를 파악할 방침이다.
이현미·박세준 기자 engin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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