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때면 “옷은 더울 때 시원하고, 추울 때 따뜻하면 되지”라며 멋 좀 부리려는 후배들을 타박하던 선배가 생각난다. 패션은 여성의 몫이고 허영에 다름 아니라고 말하곤 하던 그는 정장에 넥타이를 반듯하게 매고 다녔다. 그것이 검소함의 상징이라도 되는 듯했다. 그런데 넥타이는 여름에 시원하게 해주고 겨울에 따스하게 해주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 같다. 외계인이 지구에 와서 목에 타이를 줄줄 매고 다니는 사람을 본다면 뭐라고 할까. 타이가 남성에게 외적 허영의 마지막 보루라는 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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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석 철학자 |
허영은 흔히 실속 없는 겉치레라고 비판받는다. 속 빈 강정인 것이다. 실용적이지 못하다. 칸트의 말처럼 유·무익성과 관계없으니 당연하다. 하지만 허영 없이는 모든 사회화 과정이 빡빡하기 짝이 없는 상태가 되기 쉽다. 특히 의복, 화장, 미용 등 모든 외모 가꾸기의 허영은 ‘나’를 봐주는 상대를 전제하기 때문에 사회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인간 문화가 다양하게 발달하는 것도 허영의 추동력을 받기 때문이다. 물론 허영심을 적당히 발휘한다는 전제 조건에서 그렇다.
사실 사회화 과정에서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다른 성격의 허영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지적 허영과 도덕적 허영이다. 지적 허영에 들뜬 사람은 자신의 말만 맞다고 한다. 도덕적 허영에 물든 사람은 자신만이 올바르다고 한다. 이는 자신의 지성과 도덕성을 지나치게 겉치레하려는 욕망의 표현이다. 이 모두 잘난 체하는 유아독존적 허영이다. 이에 정치적 허영도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정치적 허영 없는 정치인은 없겠지만, 지나치면 정치는 협상과 협력이라는 원칙을 잊고 오로지 최고 권력의 쟁취라는 환상을 먹고살기 십상이다.
그러고 보니 이 세상에 허영 없는 삶은 없는 것 같다. 존 번연이 ‘천로역정’에서 묘사했듯이, 인간 세상 자체가 ‘허영의 시장(Vanity Fair)’인 것이다. 번연이 말하는 허영의 시장은 “새로 선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더구나 연중무휴 개장한다. 번연은 이 세상에 사는 한 “허영의 시장을 지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이승에서의 삶은 날마다 서는 허영의 시장과 함께하는 삶이다.
허영이 배제된 삶은 이 세상에서의 삶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허영을 관리하면서 살아야 한다. 이 과제가 곧 삶의 지혜 그 자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허영을 무시하고 배제하려고 하면 오히려 도덕적 허영에 빠지기 쉽다. 그러므로 ‘허영의 관리’라는 과제를 인식하는 것은 허영의 세계에 균형을 잡는 일이다. 그렇다고 허영에 들뜬 삶을 살라는 말은 물론 아니다. 외모와 패션의 허영에서 정치적 허영에 이르기까지 허영의 관리라는 전향적 자세가 필요하다. 그래야만 오히려 우리 의식이 허영과 대화할 수 있다. 윤리적으로 폄하되는 것들에 대한 칸트의 철학적 성찰 역시 일찍이 이런 전향적 사고의 단초를 제공한 것 아니겠는가.
김용석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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