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의 문을 연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Charles-Pierre Baudelaire∙1821~1867)의 기념비적인 시집 ‘악의 꽃’(Les Fleurs du mal) 1857년 초판본이 고려대도서관에 소장된다. 출간 당시 재판에 넘겨져 판매금지당하는 우여곡절을 겪어 세계에서도 희귀한 판본이다. 국내 보들레르 연구 대가로 프랑스 현대시 연구의 틀을 정립한 강성욱(1931~2005) 고려대 명예교수가 1968년 프랑스에서 발견해 소장하던 책을 작고하기 전 제자 황현산(1941~2018) 교수에게 맡겼고, 황 교수가 지병이 악화되자 2018년 3월 스승의 뜻에 따라 고려대 도서관에 전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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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박물관 심의 현장에 공개된 보들레르 ‘악의 꽃’ 1857년 초판본. 강성욱 고려대 명예교수가 구입해 소장하다가 황현산 교수를 거쳐 고려대도서관에 기증됐다. |
이 희귀본이 지난 13일 서울 고려대박물관에서 처음 공개됐다. 이 시집의 진위와 가치를 평가하기 위한 심의 자리였다. 이 자리에는 전경욱 고려대박물관장을 중심으로 최동호(고려대 명예교수), 고형진(고려대 국어교육과 교수), 김종회(경희대 국문과 교수), 조재룡(고려대 불문과 교수) 등 심의위원 5명이 참석해 실물을 검증하고 평가했다. 검증 가액은 강 교수가 추가로 기증한 관련 자료들의 가치를 고려해 5억원으로 산정됐다. 보들레르의 사인이 들어간 초판본은 파리 경매에서 13억원에 거래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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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피에르 보들레르. |
출간한 지 160년이 지났는데도 종이 질이 양호하고 글자가 선명해 당시 인쇄술 수준을 보여줄 뿐 아니라 컬러 표지는 물론 맨 뒷장의 출판정보에 이르기까지 낱장이 뜯어지거나 훼손되지 않아 보관상태가 좋다는 평가를 받았다. 강성욱 교수 생전에 일본에서 보들레르 전시를 기획하면서 대여해달라는 요청을 했지만 거부했다고 한다. 강 교수는 당시 이 책을 구입하면서 아내의 결혼반지까지 팔았고 손에 넣은 뒤에는 만세삼창을 외쳤다고 강 교수 유족은 전한다. 조재룡 교수는 “보들레르 초판본을 갖는다는 것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발견해 국립박물관에서 보존하거나 ‘모나리자’ 원본을 소장하는 것과 같은 문화사적 의미가 있다”면서 “역사적으로 우여곡절을 겪은 시집이라 더욱 그러하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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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박물관에서 심의위원들(오른쪽부터 김종회 최동호 전경욱 고형진)이 보들레르 시집 초판본을 검증하고 있다. |
산문시집을 제외하곤 보들레르의 유일한 시집인 ‘악의 꽃’은 1857년 출간했지만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비난에 직면해 기소되어 벌금을 물고 6편을 삭제할 것을 명령받았다. 보들레르는 이 시집의 운명을 직감하고 재판 전 편집자에게 출판사에 남은 책을 급히 감추어두라고 당부해 일부를 숨길 수 있었다. 이 시집은 1세기가 지난 1949년, 프랑스 최고재판소로부터 판결 정지명령을 받아 명예를 회복했다.
보들레르는 당시 삭제 명령을 받은 6편을 제외하고 ‘파리의 풍경’ 등 35편을 추가해 구성도 바꾸어 두 번째 ‘악의 꽃’을 1861년 출간했고, 현재 연구자들이 대표적으로 들여다보는 텍스트가 되었다. 국내에 ‘악의 꽃’ 일부는 황현산 번역으로 민음사에서 나온 판본이 있고, 문학과지성사에서 윤영애(상명대 교수) 번역으로 전편이 출간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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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룡 교수 |
조재룡 교수는 “보들레르는 프랑스 시인이기에 앞서 현대시의 문을 연 독보적인 시인”이라면서 “‘악의 꽃’으로 현대시의 모범을 보여주면서 길을 열었을 뿐 아니라 ‘파리의 우울’ 같은 산문시도 개척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추상적이고 낭만적이었던 당대 시단에서 보들레르는 생활과 역사, 온갖 인간군상의 추악한 면과 정치적인 모습들까지 시라는 것에 기가 막히게 담아냈다”고 덧붙였다. 조 교수는 “시적 언어에서도 혁명을 가져와 시어가 되지 않았던 일상적인 범박한 말들로 시를 썼을 뿐 아니라, 차마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중요한 시인”이라고 보들레르의 문학적 위상을 상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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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욱(왼쪽) 교수와 황현산 교수 |
강성욱 교수는 작고 직전 그의 맏제자 황현산 교수에게 이 책을 넘기며 번역을 부탁했고, 황 교수는 담도암 발발 전 ‘악의 꽃’을 완역해 원고를 조재룡 교수에게 전해 검토를 의뢰했지만, 주석을 달지 못한 채 작고했다. 황 교수는 스승이 전해준 희귀본을 생의 마지막에 고려대도서관으로 보내 후대 연구자들에게 짐을 넘긴 셈이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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