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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에서 ‘최악’으로 … 그린스펀의 명암

입력 : 2018-11-10 03:00:00 수정 : 2018-11-09 20: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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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레이건에 발탁돼 연준 의장 취임 / 돈 풀어 美 경제안정… 세계적 스타 떠올라 / 2008년 금융위기로 수조弗 가계저축 증발 /“그린스펀 시절 뿌린 씨앗 탓” 비난 쏟아져 / 전문가들 “순진할 정도로 시장 신뢰가 원인" / "현대 금융의 역사" 그린스펀의 삶 해부 / 저자, 인간 탐욕이 빚어낸 재앙 되돌아봐
세바스찬 말라비 지음/박홍경 옮김/다산출판사/2만9000원
앨런 그린스펀의 삶과 시대/세바스찬 말라비 지음/박홍경 옮김/다산출판사/2만9000원


1986년 1월 23일 백악관 루스벨트 룸에서 비밀회의가 열렸다.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 시카고 대학 교수 등 10여명의 월가, 학계 전문가 얼굴이 보였다. CIA 국장도 참석했다. 키가 크고 구부정한 월터 리스턴(Walter Wriston) 시티그룹 회장도 나왔다. 리스턴은 시티를 최고 상업은행으로 키운 입지전적 인물이다. 두 시간 동안 열띤 토론이 이어졌을까, 문이 열리더니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들어왔다. 대통령의 관심사는 오로지 하나 물가 안정이었다. 레이건은 당시 물가상승률 4%에 만족하지 않았다. “인플레이션을 0으로 끌어내리지 않으면 문을 박차고 나갈 것”이라며 으름장을 놨다. 레이건은 “바스티아(Bastiat)는 ‘명목화폐를 사용해서 살아남은 문명은 없다’고 말하지 않았나요?”라며 방에 모인 백악관 경제자문위원들을 몰아붙였다. 바스티아는 19세기 유명한 경제사상가이다. 프리드먼이 끼어들었다. “오늘날에는 명목화폐가 표준으로 인식되고 있다”고 했다. 대통령의 의중은 분명했다. 화폐를 찍어내는 관료들의 본능을 억제해서 인플레이션을 잡으라는 것이다.

“상품본위제도는 어떻습니까?”

차분한 어투로 누군가가 말했다. 그러면서 금본위제 역사를 풀어 설명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앨런 그린스펀이었다. 그는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저명한 대학 교수도, 민간 분야의 거물도 아니었다. 리처드 닉슨 이후 모든 공화당 출신 대통령이 그의 조언을 높이 샀다는 이유로 비밀회의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는 연방 예산, 철강 생산량, 금융 달인으로 통했다. 능숙한 사교 댄서였고 값비싼 차량을 몰았으며 아름다운 여성과도 어울렸다.
저자는 “어떤 비판을 받는다 해도 앨런 그린스펀의 일생은 곧 현대 금융의 역사”라면서 “당대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 지도자로서 그는 평생 동안 중대한 변화와 씨름했다”고 평가했다.

레이건은 금본위제와 관련한 그린스펀의 발언에 반색했다. 레이건은 “과거에는 정장 한벌을 50달러면 살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 돈으로 세탁도 어렵다”며 불만을 제기했다. 그린스펀은 동의했다. 그러면서 “연방정부의 문제는 돈을 찍어낼 수 있다는 점”이라면서 “명목화폐를 마구 찍어내는 중앙은행(연준)이 존재하는 한 정치인들은 늘 한도를 초과해 지출할 것”이라고 비난했다. 다시말해 관료들은 부채가 발생하더라도 연준이 화폐 찍어내는 기계를 돌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는 것. 그린스펀은 연준 설립을 “미국 역사에 재앙과도 같은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레이건의 비밀회의가 열린 지 1년 반 후인 1987년 8월 11일 그린스펀은 연준 의장에 취임했다. 이후 18년 반 동안 그는 과거에 자신이 배격했던 아이디어, 즉 연준의 화폐 발행으로 경제를 안정시켰다고 자랑했다. 그 덕에 세계적인 스타로 떠올랐다. 그린스펀의 성공은 연준이 발행하는 화폐(명목화폐)를 비판했던 개인 이력으로 볼 때, 참으로 아이러니한 경우다.

밀턴 프리드먼은 그린스펀에게 대단한 일을 해냈다며 찬사를 보낸 뒤 10개월 후인 2006년 11월 숨을 거뒀다. 그는 2008년 금융위기를 목격하지 못했다. 더구나 오랜 친구가 극적인 재평가를 받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금융위기로 인해 수백만 개의 일자리가 날아갔고 수조 달러의 가계저축이 증발했다. 1930년대 이래 최악의 불황이 미국을 덮쳤다. 금융위기는 그린스펀의 유산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핵심적 사건이다. 그린스펀은 비난을 피해갈 수 없었다. 버블 붕괴로 막대한 비용이 발생했다. 사전에 버블을 피하거나 최소한 완화시키려는 조치를 취했어야 옳았다. 또한 그린스펀은 금융시스템(금융공학)이 거칠게 날뛰는 것을 과소평가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지난 50년 동안 기만적인 신용 사이클에 대해 경고하기도 했다.

그는 유대인이면서도 반유대주의자인 리처드 닉슨에게 조언을 제공했다. 보수주의자이면서도 세금 인상을 옹호했다. 자유의지론자이면서도 구제금융을 여러 차례 지지했다.
앨런 그린스펀이 미국 연준 의자에서 퇴임할 즈음인 2005년 12월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G7(주요 7개국)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 만찬장에서 만화 한 컷을 담은 액자를 선물받고 있다. 만화에는 축구선수로 묘사된 그린스펀이 세계 경제를 구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린스펀의 업적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나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 지도자로 군림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린스펀이 금리를 인하하고 위험 부담 행위(모기지 대량 발행)가 대대적으로 일어나도록 용인한 이유는 무엇인가. 만약 금리를 올렸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까. 분명히 금리에 대한 그린스펀의 태도는 이해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다. 대다수 논객들은 그린스펀이 시장을 순진할 정도로 신뢰했기 때문에 규제 강화에 나서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다시 말해 금융업계를 지나치게 신뢰한 나머지, 이들 손에서 탄생한 혁신적 상품(파생상품)이 경제의 근간을 뒤흔들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린스펀은 단순한 시장 지지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린스펀은 정부가 더 이상 잘해낼 수 없음을 인식한 현실주의자였다.

어쨌든 그린스펀과 그 시대를 이끈 지도자들은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 대형 금융사의 왜곡된 인센티브를 충분히 경계하지 않았다. 버블과 레버리지에 안이하게 접근했다. 저자는 “(금융사들은) 금융 리스크를 제거하라는 요구를 받았겠지만 그러한 리스크는 인간의 속성상 피해가기 어렵다”면서 “그런 점에서 후세인들은 그린스펀의 일생을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저자는 파이낸셜타임스의 객원편집자에 이어, 퓰리처상 최종 후보에 두번 오를 만큼 실력을 인정받는다. 현재 미외교협회 선임 연구원으로 있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 인간의 탐욕이 빚어낸 재앙이 어떤 결과로 드러나는지 반추해본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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