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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반공궐기대회. 국가기록원 |
보수 야당은 좋은 비판거리를 잡았다며 '공격 앞으로'를 외쳤고 정부 여당은 '사실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 '분위기를 좋게 하려는 것으로 큰 틀에서 이해해야 한다'며 방어막 치기에 급급한 모양새다.
리선권 '냉면' 발언이 논란거리가 되고 여야가 치고받는 것은 북풍(北風)이 아직도 우리 사회에 어느정도 힘을 쓰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는 분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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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피난민 행렬. 국가기록원 |
북풍이 힘을 쓰게 된 것은 두말할 필요없이 한국전쟁이라는 비극적인 사건 때문이다. 한국전쟁으로 남측에서만 77만여명의 민간인이 죽거나 소식이 끊겼고 700만명이 넘는 이산가족이 생겼다. 전사한 국군과 경찰관만해도 14만명이 넘었다. 서너집 건너 한집꼴로 피해를 받고 가족 생사를 알 수 없었다.
한국전쟁을 경험한 이에게 북한은 용서할 수 없는 원수였고 '빨갱이'라고 한번만 찍히도 끝장이었다.
이러한 정서는 1950년대 자유당 정권은 물론이고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 때 더욱 굳어졌다. 박정희 정권은 틈만 나면 '북풍' 주사를 국민들에게 접종, 톡톡히 재미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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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전날인 1987년 12월 15일 서울로 압송된 김현희. 연합뉴스 |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1963년 5대 대통령 선거를 통해 정식으로 집권하게 된다. 이후 1964년 인민혁명당 사건을 발표해 분위기를 다잡았고 1967년 5·3 대통령 선거 직전인 1월 9일엔 해군당포함이 북한 해암포에 격침당한 일, 3월 22일 이수근의 판문점 귀순 등의 사건을 '북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박정희'라는 프레임으로 연결했다.
1968년 1월 18일 김신조 등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인 124군부대 특수부대원 31명이 휴전선을 넘어 청와대 인근 자하문까지 접근한 1·21사태는 북한 알레르기의 정점을 이뤘다.
16년만에 직선제로 치러졌던 1987년 12월 16일 제13대 대선을 앞두고도 북한변수가 머리를 들었다. 그해 11월 29일 이라크 바그다드를 떠나 UAE 아부다비 공항을 경유해 서울 김포공항으로 오던 KAL858편이 인도양 상공에서 폭발, 115명이 사망했다. 당시 안전기획부는 북한 공작원에 의한 폭탄테러라며 김현희를 아부다비에서 검거, 국내로 압송했다.
전두환의 뒤를 이어 등장한 민정당 노태우 후보측은 '안보불안' '색깔론' 등을 들먹이면서 이를 선거에 활용했다. 노태우가 828만표로 김영삼(633만표) 김대중(611만표) 김종필(182만표) 3김을 누르고 당선된 배경 중 하나가 KAL폭파 참사라는데 이견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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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열병식 |
북풍은 '북한 변수'를 뜻하는 것으로 1996년 4·11 총선(15대 국회의원 선거) 때 본격 등장한 용어다.
당시 집권여당이었던 민주자유당은 1995년 2월9일 김종필 전 총리가 공화당계를 이끌고 탈당하고 연말엔 전두환 노태우 전직 대통령이 구속되는 등 위기를 맞아 신한국당으로 개명했다.
신한당으로 간판을 바꿔 처음 나선 선거가 4· 11총선. 김대중 전 평화민주당 총재가 정계복귀 선언과 함께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고 김종필 전 총리는 자유민주연합을 만들어 신한당에 맞서는 등 상황이 녹록치 않아 1/3석을 간신히 넘길 것이라는 평까지 나왔다.
이때 총선을 앞두고 판문점에서 북한군이 무력시위를 펼쳐 국민들에게 안보불안감을 심어줬다. 이에 힘입어 신한당은 139석을 차지했다. 반면 국민회의는 79석, 자민련은 50석, 통합민주당은 15석을 얻었다.
일부에선 정부 여당이 대북지원을 대가로 북한측에 적당히 무력시위를 해 줄 것을 요청했다는 음모론까지 제기했다. 이후 북풍은 선거때 힘을 발휘하는 북한변수라는 고유명사로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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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풍사건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전원책(왼쪽), 유시민. jtbc 캡처 |
1997년 12월 15대 대선에서도 북에서 바람이 불어 왔다. 집권여당 한나라당 이회창 대선 후보 대세론이 아들의 병역문제로 휘청거렸다.
이때 청와대 관계자들이 베이징에서 북한 인사를 만나 '휴전선에서 총격 등 무력시위를 벌여 달라고 요청했다가 미수에 그쳤다'는 총풍 사건이 터져 나왔다. 그 당시를 묘사한 영화가 대북공작원 흑금성의 일을 그린 '(북풍)공작'이다.
하지만 북풍도 시대 흐름앞엔 어쩔 수 없었다. 한국전쟁을 경험치 못한 세대가 주축을 형성한 21세기 들어 북풍은 틀었다 하면 히트하던 예전 그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2002년 16대 대선 국면에서는 제2연평해전과 2차 북핵 위기가 발생했지만 노무현 바람을 이기지 못했다.
2010년 3월 26일 천안함 침몰이라는 메가톤급 북풍이 일었지만 그해 6·2 지방선거에선 여당이 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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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27일 김정은 위원장과 손을 맞잡고 군사분계선을 잠시 넘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 공동취재단 |
신북풍은 북풍과 결을 달리하는 것으로 보수당이 진보정권의 대북정책을 비판하는 용어로 사용됐다.
2000년 4·13 총선을 사흘 앞두고 김대중 정부가 남북 정상회담 합의 사실을 발표하자 한나라당은 "총선용 신북풍"이라며 발끈했다.
신북풍은 2018년에 재등장했다. 남북정상회담, 북미정상회담이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 숨가쁘게 전개됐고 국내외 언론의 관심이 집중됐다.
보수야당을 자처한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는 "대한민국 안보가 벼랑 끝에 달렸다"며 "북풍을 선거에 이용하려던 저들의 저의는 미풍으로 끝났다. 남은 것은 민생파탄에 대한 국민 심판으로 투표장으로 가서 문재인 정권의 민생파탄을 심판하자"고 요구했다.
결과는 한국당의 참패로 끝났다. '신북풍은 미풍일 뿐이다'라고 했던 홍 대표는 자리에서 물러나 미국으로 떠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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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19일 평양 옥류관에서 냉면을 먹고 있는 구광모 LG그룹 회장(왼쪽부터), 리선권 조평통 위원장, 손경식 경총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공동취재단 |
남북, 북미정상회담 등 만화같은 일이 잇따라 일어나면서 한반도 봄 무대 주연자리를 빼앗긴 보수야당에게 리선권 '냉면'은 놓칠 수 없는 또다른 북풍, 줄여서 ‘또풍’이라는 지적이 많다.
한국당은 문재인 정권의 대북저자세가 빚은 굴욕이라며 통일부 장관과 함께 청와대를 물고 늘어졌다. 오랜만에 이슈선점에 성공, 나름의 효과를 봤다.
하지만 '또풍'의 지구력이 어떨지는 미지수다. 또풍이 근거없는 것임이 밝혀지거나 최고책임자인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오해를 빚게해 미안하다', '외교관이 아니어서 말솜씨가 매끄럽지 못했다'라고 하면 또풍은 동력을 잃고 만다.
여기에 '또풍'을 가로막는 장벽까지 등장한다면 또풍 위력은 뚝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 장벽은 2차 북미정상회담이나 남북· 북미간의 또다른 결과물, 바로 '신북풍'이다.
이런 전망이 가능함에도 한국당이 '또풍'을 아끼는 숨은 이유는 집토끼를 한군데 모을 수 있는 바로 그 때문이 아닐까 싶다.
박태훈 기자 buckba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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