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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음서제의 조화와 균형… 고려 귀족사회 지탱한 두 풍경

입력 : 2018-10-13 03:00:00 수정 : 2018-10-12 20: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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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선 지음/일조각/3만5000원
고려·사회·사람들/김용선 지음/일조각/3만5000원


고려시대 출세의 방법은 주로 과거 급제 또는 음서였다. 두 제도 모두 고려 귀족사회를 지탱한 축이었다. 과거는 고려 광종 9년(958) 시작해 900년 넘게 지속했다. 과거는 학문적 능력을 평가해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지만, 응시에 신분 제한이 있었다. 특권층에게만 허용됐다는 것. 과거는 비정기적으로 개최했는데, 문학적 능력을 시험하는 제술업(製述業)은 250회 시행돼 급제자 6330명이 배출됐다. 저자는 “제술업은 양인에 대한 기록이 나오지 않아 농민 자제가 응시하거나 합격하는 일은 거의 없었던 듯하다”며 “중앙 관리와 향리 계층 이상만 과거를 볼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일정한 덕이나 공을 쌓은 관리의 자손이 관직에 나가도록 하는 음서는 그야말로 특권층을 위한 제도였다. 저자는 “고려시대에는 공신으로 책봉되거나 특별한 공훈을 세우거나 5품 이상 관리가 되면 친족이나 후손에게 음서를 줄 수 있었다”며 “음서를 받는 데는 일정 수준의 학문적 능력을 갖출 필요가 없었기에 귀족사회를 안정시키고 특권을 유지하는 데 음서가 매우 중요한 요소로 기능했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음서를 받아 관리가 된 다음 과거에 합격하는 것이 성공에 가장 유리했다고 분석한다. 고려는 연공서열처럼 근무 기간에 따라 관리를 승진하는 순자법(循資法)을 적용했기에 일찍 관리가 되면 높은 자리에 오르기가 수월했다.

저자는 “음서는 평균 15.4세에 제수됐고, 과거 급제자 연령은 평균 24.4세였다”면서도 “음서 출신자들은 오로지 일반 행정직만 등용됐지만, 과거 급제자는 일반 행정직뿐만 아니라 조칙 작성과 사서 편찬 같은 일을 맡는 문한직(文翰職)에도 오를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고려 지배계층은 음서와 같은 법제적 권리를 적절히 활용하면서 특권을 이어갔고, 과거도 이러한 대세 속에서 운영됐다”며 고려는 문벌사회 혹은 관료제 사회라기보다 귀족사회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고려는 학문적 능력을 중시하는 과거제와 가문의 배경을 중시하는 음서제를 배타와 대립 관계로 엮지 않고 조화와 균형을 이루면서 운영했다”면서 “지방 교육기관인 사학(私學)도 지방의 향리 계층들이 주로 입학하면서 중앙의 지배계층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신라의 경우 피지배민을 압박하는 통치정책이었다면, 고려 귀족사회는 개방적이고 조화와 타협을 중시했다”고 말했다.

정승욱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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