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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남녀 성비 최대 116'…현재에도 미친 영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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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07-11 15:27:06 수정 : 2018-07-15 11: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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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아제한정책 포스터.
조남주 작가는 지난해 화제작 ‘82년생 김지영’을 출간하면서 “1980년대는 (강력한) 산아제한 정책과 성감별이 (동시에) 가능해져 성비가 매우 불균형해진 시기”라고 밝힌 바 있다. 작품 속 주인공이 성장하며 크게는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를 비롯해 여러 위기를 겪었지만 기저에 깔려있던 극심한 남아선호 사상 등의 사회 분위기도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1982년생은 제1차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의 자녀 세대인 제1차 에코붐 세대(1979∼1985년생)에 속한다. 인구 구조와 관련 정부 정책의 변화는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11일 제7회 인구의 날을 맞이해 인구 변화로 인해 한 세대가 어떻게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는지를 각종 통계와 함께 살펴봤다.
◆경제성장 위해 부수적으로 추진된 인구정책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1960년대 이후 정부의 인구정책은 국가의 장래나 인구 변화 자체에 집중하기보다는 경제성장을 달성하기 위한 부수적인 차원으로 다뤄졌다. 국가의 경제발전 방안에 골몰하던 군부 지도자에게 폭발적인 인구성장이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이 시기의 폭발적인 인구 증가는 우리나라가 산업사회로 이행되기도 전에 노동력의 과잉 공급으로 작용했다. 1963년 당시 실업률은 8.2%로 잠재적 실업까지 감안하면 노동력 과잉 문제가 경제성장을 억제하는 주요 걸림돌로 급부상했다.
포스터로 살펴보는 인구정책 변화
1960년대에 ‘3·3·35운동(3명의 자녀를 3년 터울로 35세 이전에 단산하자)’으로 시작된 정부주도의 가족계획사업은 1986년 ‘하나 낳기 운동’으로 최고조에 달했다. 1990년대 포스터를 살펴보면 남아 선호로 인한 성비 불균형이 시급한 사안으로 급부상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출산을 장려하는 정책은 2000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등장했다.
자료: 보건복지부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정책은 인구 증가를 통제하기 위한 부분에 초점이 모였다. 특히 1973년 시행된 모자보건법은 임신중절수술의 예외를 규정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형법상 금지된 낙태를 허용하는 물꼬를 트게 했다. 이후 가족계획의 강화, 경제발전 등을 구실로 임신중절의 사유를 확대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종교계의 벽에 막혀 실현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임신중절은 효과적인 각종 피임방법이 보편화한 1990년대 이후에도 피임이 실패하면 최종적으로 택하는 해결책으로 인식됐다.

학계의 한 관계자는 “기혼여성의 피임실천율이 높지 않았던 1960년대와 1970년대 초반까지 정부는 피임이 실패하면 사후 피임의 형태로 인공임신중절을 의도적으로 유도한 측면이 있었다”고 밝혔다.
◆인구구조의 변화, 혼인·구직난까지 초래

이러한 가운데 태아의 건강 및 기형을 판별하기 위한 목적의 의료적 검사법이 보급되며 기형적인 출생성비 상황이 찾아왔다. 태아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한 융모막 검사나 양수 검사, 초음파 검사 등이 성감별의 목적으로 활용됐기 때문이다. 남아선호사상과 임신중절수술이 복합적으로 결합한 결과였다. 가구당 자녀 수는 줄어들지만 최소한 1명의 아들을 낳기 위해 여아를 선별적으로 낙태하는 행위가 널리 퍼진 셈이다.


이로 인해 1980년 자연 상태에 가까운 105.3(여아 100명 대 남아 105.3명)의 성비는 1990년 116.5까지 치솟았다. 1990년의 상황을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첫째아의 출생성비는 108.5, 둘째아는 117.1이지만 셋째아부터 189.5로 급증해 넷째아는 215.1, 다섯째아 이상은 195.9에 달했다. 이같은 출생성비의 불균형 상태는 2000년대 중반이 돼서야 완화됐다.

1990년 무렵 극에 달한 출생성비 불균형은 현재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통계청의 혼인 통계를 살펴보면 1970년대 연간 20만건이었던 혼인 건수는 제1차 에코붐 세대 시기인 1980년대 초반부터 제2차 에코붐 세대(1991∼1996년생)의 1990년대 초중반에 이르기까지 연간 40만건 내외를 기록했다. 이후 2000년대 초반 30만건 내외로 줄어든 뒤 2016년부터는 20만건대로 더 줄어든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아시아인구학회장인 김두섭 한양대 교수(사회학)는 “당시 출생성비의 불균형이 최근 혼인시장의 왜곡을 초래한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인구구조의 변화는 최근 청년구직난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정부는 올해 일자리 대책 및 전망을 발표하면서 “에코붐 세대가 취업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입하는 2021년까지 청년 구직난이 해소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인구정책, 장기간 지속적·일관적으로 추진해야”

이렇듯 인구 문제의 영향은 당면한 시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당시에는 해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한 번 시작된 변화로 인해 수십 년에 걸쳐 사회 전반에 다양한 결과를 초래하게 마련이다.

우리나라의 인구 상황의 커다란 변곡점은 1980년대로 볼 수 있다. 중차대한 변화의 시기에 제대로 대응하는 차원을 넘어 미래에 대한 대비까지 해야 했다. 하지만 그 시기를 놓친 것은 물론 정반대의 정책을 펼친 결과, 세계 초유의 저출산 상황을 맞닥뜨리고 말았다.

정부는 1983년 우리나라의 인구가 4000만명을 돌파하자 이듬해 경남 창원을 시작으로 전국 16개 주요 도시에 인구시계탑을 세웠다. 높이 11m, 폭 6m의 이 조형물은 인구증가의 심각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사람 형상이 전광판을 떠받치는 형태로 제작됐다. 인구시계탑은 향후 10년간 우리 국민뿐 아니라 인구·가족계획의 연수를 목적으로 방한한 외국인에게도 단골 견학지로 자리매김했다.
다른 측면에서 살펴보자면 1983년은 우리나라의 합계출산율이 2.06명을 기록한 해였다. 인구가 증가하지도 감소하지도 않는 인구대체 수준의 출산율(2.0명)에 근접한 것이었다. 이는 제5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 계획(1982∼1986년)에서 설정한 1988년의 목표치를 5년이나 앞당겨 달성한 것이기도 했다. 1984년에는 합계출산율이 1.76명으로 낮아지며 저출산사회의 진입을 알렸다. 이 또한 1995년의 목표치(1.75명)가 10년 이상 앞서 실현된 것이었다.

그러나 전체 인구 증가에 집중한 정부는 더욱 강력하게 인구증가억제정책을 실시했다. 1970년대 후반 합계출산율이 2.8 근방에서 정체되는 가운데 인구가 계속 불어나는 상황에만 집중한 셈이다.

인구 구조의 변화나 향후 추이에 대한 세심한 고찰은 없었다. 1982∼1986년에 시행된 불임수술만 173만건에 달했고, 여기에 자궁 내 장치 시술과 피임도구 및 피임약 보급 등을 모두 더한 피임보급 총량이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정부의 이같은 인구증가억제 기조는 1996년까지 이어졌다. 1990년대 70만명 전후를 오가던 연간 출생아 수는 IMF 외환위기까지 겹치며 2000년대 초반 40만명대로 급격히 주저앉았다.
부랴부랴 저출산고령사회기본법을 제정한 것은 2005년에 이르러서였다. 당시 합계출산율은 1.08까지 곤두박질쳤고, 이미 2000년에 노인(65세 이상) 인구 비중이 7%인 고령사회에 진입한 뒤였다. ‘인구대체 수준의 출산율에 도달한 시점이나 외환위기 이후 즉각적으로 종합적인 인구정책을 수립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쉽사리 가시지 않는 대목이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인구정책은 문제가 발생할 때 집중적으로 대응하는 것과 동시에 한 세대를 내다보고 일관적이고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준영 기자 papeniqu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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