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 모리슨, 지미 헨드릭스, 제니스 조플린은 1960년대 미국의 팝음악을 주도했던 천재적인 음악가들이다. 또한 그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27세에 사망했다. 같은 세대는 아니지만 90년대를 대표하는 미국의 록밴드 너바나(nirvana)의 리더인 커트 코베인(Kurt Cobain)도 27세에 세상을 떠났다. 시대를 뛰어넘어 그들의 음악은 현실에 대한 반항과 좌절이 깊이 박혀 있어 강렬하면서도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1989년에 데뷔한 너바나는 코베인이 사망한 1994년까지, 5년이라는 짧은 기간 활동했지만, 90년대를 대표하고 X세대를 대표한다. 얼터너티브 록을 선도하는 밴드였고 온 세계 젊은이들을 열광시켰다. 후줄근한 카디건과 늘어진 티셔츠와 낡은 청바지, 그리고 컨버스 운동화. 감지 않아 번들거리는 머리 그리고 텁수룩한 수염. 그중에서도 빛나는 우수 어린 눈빛. 그의 스타일은 90년대 젊은이의 스타일이 되었고, 그들의 노래는 간결한 멜로디와 다소 평이한 코드 진행의 노래였지만 강렬했고 많은 사람은 열광했다.
그러나 코베인의 우울은 무대용 표정이 아니었고 분위기를 자아내는 몸짓도 아니었다. 우울한 표정과 선병질적인 모습은 불우한 성장기의 결과이기도 했지만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나온 천형과도 같은 것이었다. 음악적 성공과는 상관없이 그는 힘들어 했고, 마약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가 어느 날 집에서 자살한 채 발견된다.
처참하게 누워 있던 그의 옆에는 유서가 한 장 놓여 있었다. “To Boddah”로 시작되는 그의 유서에서 그는 좌절감을 잔잔히 토로한다.
“서서히 사라질 바에는 한꺼번에 불타버리는 게 낫다.”
유서의 말미에 나오는 이 문장은 닐 영의 노래 가사에서 따온 말인데 그의 짧았지만 불꽃처럼 타오른 일생을 아우르는 말이라 생각한다. 그는 시대의 우울을, 세상의 고통을 온통 짊어진 듯 괴로워하다가 그렇게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가 이끌었던 그룹의 이름 너바나는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 즉 열반, 혹은 적멸을 의미한다. 열반(涅槃)이란 방황하면서 타오르는 불을 꺼버리고 깨달음의 경지로 들어선다는 의미인데, 우리 삶 속 구석구석 박혀 있는 괴로움과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또한 깨달음의 즐거움이다. 적멸(寂滅)이란 말은 열반의 다른 표현인데 모든 인과의 사슬을 끊어버리는 경지이다. 그러나 정작 열반(Nirvana)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가수가 되었음에도, 불행하게 살다가 불행하게 세상을 떠난 코베인의 삶은 무척 아이러니하다.
그 깊은 고요, 평안. 적멸의 세계에 들어서면 시각, 촉각, 청각 등 모든 감각마저 소멸되고 정신만이 자유롭고 자재롭게 존재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고요히 소멸된다 혹은 모든 것이 소멸되어 한없이 고요해진다. 불교가 가장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런 욕망의 소멸, 고통의 소멸, 더불어 자신의 존재의 소멸을 이야기하는 지점이다. 내 자신을 소멸시키는 것이 목표라니, 내세의 행복보다는 지금의 행복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간 알았던 종교와는 사뭇 다른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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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을 지나 안으로 향하는 길은 직선으로 곧장 가지 않고 가면서 세 번 꺾어 들어가게 했고, 대지의 원래의 높낮이를 이용해 세 개의 단을 조성하여 순서대로 종무소와 꾸띠, 요사채, 법당 등 위계에 맞게 건물을 올려놓았다. |
석가모니는 왕자의 자리를 벗어버리고 세상으로 나와 고행을 한다. 6년 동안 그는 요가수행자들의 방법대로 풀만 먹기도 하고 거름을 먹기도 하고 극단적으로 식사량을 줄여보기도 하고 가시덤불 위에 눕기도 하며 고행을 이어나간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그것은 진리로 가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고행을 접고 보리수나무 그늘 아래 앉아서 명상을 한다. 그리고 삶과 죽음이 무한이 이어지는 환상을 보게 된다. 마침내 행복이란 이생에서나 종교의 구원을 통한 내세에서가 아닌, 오직 욕망이 사라졌을 때 찾아오는 완전한 평화인 열반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고통 끝에 어떤 깨달음이 오는 것이 아니라, “시작도 즐겁고 중간도 즐겁고 끝도 즐거운” 그런 것이 불교의 핵심인 중도(中道)사상이라고 우리의 건축주가 이야기해주었다. 장좌불와로 몇십 년을 수행하여 해탈하는 것이 바른 구도자의 모습일 거라고, 아주 평면적인 지식만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 그 이야기는 무척 신선했다. 그 건축주는 사성제(四聖諦)와 팔정도(八正道)를 개념으로 집을 짓자고 했다. 그 집은 열반에 이른 부처님의 집이며 열반에 이르고자 하는 사람의 집이다.
2년 전 어느 날 사무실로 호리호리한 체구에 지적인 인상을 가진 스님이 찾아왔다. 나와 마주앉아 아주 간결하고 군더더기 없는 말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따와나 선원이라는 이름의 사찰 불사를 계획 중인데, 명상을 하고 수행을 하는 선원의 본 건물은 건너편 산 위에 이미 설계가 시작되었고, 따로 지을 신도들이 묵을 ‘꾸띠(‘오두막’이라는 뜻의 개인 숙소)라는 시설의 설계를 맡길 회사를 찾는 중이라고 했다.
5월의 어느 오후였는데, 오는 말이 간결하니 가는 말 역시 간결해졌다. 아주 선선하게 부는 초가을의 바람처럼 이야기가 끊어지지는 않았지만, 보통 이런 정도의 온기라면 우리에게 별로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우리 사무실에 대한 적극적인 소개라든가 일의 수행 방식에 대한 대안이라든가 하는 ‘사업적인 멘트’는 별로 하지 않고 주워들어 조금 아는 불교에 관한 어설픈 이야기나 주워섬기고 있었다. 그런 경우 대부분 적당히 “예, 말씀 잘 들었습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하며 일어나서 사무실을 나간다. 그런데 선선한 대화는 열기도 없이 계속 오고가며 2시간 가까이 이어지다가 “그럼 설계를 맡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며 끝났고, 일이 시작되었다.
엄격하게 이야기하자면 나는 불교신자가 아니다. 나는 모든 종교의 기본 정신은 통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때의 입장과 그 종교가 정착되던 시절의 여러 가지 상황 때문에 형식이 달라졌을 뿐이라는 무척 무식하고 용감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건축을 공부하다 보니 절이나 반가니 민가니 하는 오래된 살림집들과 친해지고 예전의 집짓는 방식과 친해져서 약간은 고리타분한 건축관을 가지고 있는 편이다. 그래서 절이라 하면 일주문, 천왕문에서 시작해서 보살단, 신중단을 거치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하였고, 스님과 처음 만나 일의 실마리를 푸는 자리에서도 그런 이야기로 시작했다.
“종교란 지향점은 각자 다르겠지만 어디론가 들어가는 길입니다.” 그리고 그 길을 내가 아는 범위에서는 가장 건축적인 의상대사 ‘법성게’(法性偈)의 도상을 도면으로 그리고 입체적인 그림으로 만들어 보여주었다. 사실 우리의 종교건축, 특히 불교건축은 그런 길에 대한 탁월한 해석과 탁월한 공간감을 드러내고 있다. 직선을 뻗어나가기보다는 조금 휘고 많이 꺾어지고 혹은 빙 돌기도 하며, 지세와 종교적인 교의가 건축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아주 현명한 해법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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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동안 뼈대를 올리고 벽돌을 외부에 쌓고 바닥에 벽돌을 깔아서 무려 30만장의 벽돌로 공간을 완성했다. |
선원을 지을 위치는 행정구역상으로는 춘천이지만, 실은 예전에 대학생 때 엠티를 가거나 친구들과 경춘선을 타고 지나다니던 아주 친숙한 이름의 강촌이라는 동네였다. 길이 새로 나서 가는 과정이 바뀌며 조금 생소해진 동네에 땅을 보기 위해 새벽에 일찍 갔다. 이슬이 내려 촉촉해진 풀들이 온통 덮고 있는 땅을 밟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대지는 한가한 마을을 관통하는 2차선이라기에는 조금 좁고 1차선보다는 조금 넓은 아스팔트 포장 길에 면한 논이었다. 땅을 보며 선방에서 며칠씩 수행하는 신도들이 묵을 꾸띠를 구상했다. 처음에는 네모가 겹치며 그 안에 사람들이 거닐며 명상을 하는 길을 만드는 계획이었다.
설계가 진행되며 나는 의뢰인인 선원장 스님과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 사이 불교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스님이 제시하는 설계의 가이드라인 중, 사성제는 ‘고집멸도’(苦集滅道),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소멸하는 방법에 대한 고찰이다. 집착을 통한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행 공간이므로 사성제가 기본적인 개념이 되어야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이야기가 ‘중도’(中道)라는 개념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즐겁다.” 얼마나 통쾌한 이야기인가. 우리는 이상한 강박 속에서 살고 있다. 즐겁게 산다는 것은 마치 인생을 낭비하는 자세라는, 그런 강박 속에서 사람들은 점점 시들어가는 것이다. 그럴 때 “즐겁게 살아도 돼”라고 누군가 이야기해준다면 그 얼마나 자유로워질까.
부처님의 가르침이 원래 그것이며, 다만 많은 시간이 지나는 동안 여러 가지 역사적, 지역적인 요소들이 통합되며 불교의 처음 정신이 많이 훼손되었다고 한다. 설계를 협의하는 것이 아니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었다. 건축가로서 가장 즐거운 것은 다양한 직업의 다양한 전문가인 건축주들을 만나서 깊이 있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나보다 훨씬 많은 경험을 하고 상대편의 전공에 대한 예의를 차리는 사람들과의 대화는 언제나 즐거울 수밖에 없다.
그렇게 몇 개월을 보내는 사이, 건너편 산 위에 짓기로 한 법당과 선방 등 주요 시설들이 우리가 설계하는 대지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기 위해 옆에 바로 붙은 땅이 추가로 합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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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따와나 선원은 기존의 대부분의 사찰처럼 한옥으로 짓지 않고 콘크리트 구조로 뼈대를 만들고 기원정사의 유적을 상징하는 벽돌로 옷을 입혔다. 박영채 제공 |
설계의 방향을 잡을 때, 과거의 방식과 불교적인 교리를 바탕에 깔되 현대적인 생활 습관에 적합하게 계획을 하고자 했다. 또한 선원장 스님은 불교의 근원으로 돌아가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애초 석가모니가 기원정사에 앉아서 주석을 하고 사람들에게 설파하던 불교의 기본 정신을 되살리는 것, 그런 정신이 제따와나 선원을 설계함에 가장 큰 바탕이었다.
그것은 무척 오래된 것이면서 무척 혁신적인 접근이었다. 그런 점에서 기원정사의 유적을 상징하는 벽돌은 아주 적합한 재료였다. 기존의 대부분의 사찰처럼 한옥으로 짓지 않고 콘크리트 구조로 뼈대를 만들고 벽돌로 옷을 입혔다. 대신 기존 가람(伽藍) 배치의 방식을 고려해 일주문을 지나 안으로 향하는 길은 직선으로 곧장 가지 않고 가면서 세 번 꺾어 들어가게 했고, 대지의 원래의 높낮이를 이용해 세 개의 단을 조성하여 순서대로 종무소와 꾸띠, 요사채, 법당 등 위계에 맞게 건물을 올려놓았다.
1년 동안의 설계기간을 거쳐 공사를 시작했고, 뼈대를 올리고 벽돌을 외부에 쌓고 바닥에 벽돌을 깔아서 무려 30만장의 벽돌로 공간을 완성했다. 공사 역시 1년이 걸렸다. 내내 즐거운 마음으로 몇 가지 어려운 문제를 넘어가며 땅을 다듬고 집을 올리고 나무를 심었다.
그리하여 처음도 과정도 결과도 즐거운 중도의 정신이 집의 안과 밖에 스며든 공간이 완성되었다.
임형남·노은주 가온건축 공동대표·『내가 살고 싶은 작은 집』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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