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직장인 이모씨는 매년 6월이 되면 뜨거웠던 2002년의 그날을 생각한다. 학창시절 친구들과 함께 붉은 티를 입고 대한민국 경기를 응원하러 이곳저곳 다녔던 당시가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되어서다.
이씨는 처음 보는 사람과도 유대감을 형성하게 한 ‘Be the Reds!’ 티셔츠가 떠오른다고 했다. 예쁜 글씨체와 강렬한 메시지에 반해 티셔츠를 사려 애썼지만, 어디서도 구할 수 없었다면서 어느날 지방의 한 대형 할인점에서 티셔츠 여러 장 샀을 때 희열을 느꼈다고 덧붙였다.
구체적 수치는 파악할 수 없으나, 관련 기사를 토대로 ‘Be the Reds!’ 티셔츠는 전국에서 2000만장 규모가 팔려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국민 2명 중 1명이 입은 셈이다. 국가대표 축구팀 서포터 붉은악마의 의뢰를 받아 문체를 만든 디자이너가 공들인 노력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수백만원의 시안료만 손에 쥔 사실은 안타까운 역설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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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블채널 tvN에서 방영한 '응답하라 1994'의 한 장면. tvN 영상 캡처. |
4년 후, 국민들은 인기 밴드 버즈가 부른 ‘Reds go together’에 흠뻑 취했다.
국내의 한 의류업체가 ‘Reds go together’가 새겨진 티셔츠를 제작했으며, 같은 슬로건이 들어간 두건과 민소매 톱 등 다양한 제품을 생산·판매하면서 불티나게 팔려나가는 사태에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해당 업체는 월드컵 전까지 최소 70만장, 대한민국 대표팀의 성적에 따라 100만장까지 판매가 가능할 것으로 내다봤다. 비록 본선 결과가 좋지 않았지만, 곳곳에 붉은 티셔츠 물결이 넘실대는 등 4강 신화의 여운을 다시 한번 느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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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베이(ebay)에 올라온 티셔츠. 이베이 홈페이지 캡처. |
원정 최초 16강을 달성한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승리의 함성, 하나된 한국’ 그리고 ‘All the reds’라는 문구가 새겨진 응원 티셔츠들이 인기를 끌었다. 남아공에서 뛰는 태극전사가 이룰 기적을 응원하자는 의미다.
‘All the reds’ 셔츠는 국내의 한 의류그룹이 만들었으며 단순한 면에서 벗어나 통기성 위한 특수 소재를 사용하는 등 이전보다 진화했다는 평가를 일각에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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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가 1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숭인동에 있는 동묘벼룩시장에서 발견한 대한민국 응원 티셔츠. 사진=김동환 기자. |
공식 슬로건이 정해지고 특정 업체가 응원 티셔츠를 제작·판매하는 형태가 굳어지면서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는 국내의 한 대형 할인점이 전국 점포와 인터넷 쇼핑몰 등에 응원 티셔츠 공급망을 형성했다.
사상 최초로 ‘원정 8강’에 도전했던 우리나라 대표팀의 브라질 월드컵 공식 슬로건은 ‘즐겨라, 대한민국’이었다. 티셔츠 소매와 목에 파란색을 넣어 유니폼과의 연계성을 높이고, 태극기와 치우천왕 등을 새겨 눈길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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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가 1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숭인동에 있는 동묘벼룩시장에서 발견한 대한민국 응원 티셔츠. 사진=김동환 기자. |
대한축구협회는 2018 러시아 월드컵 개막 D-50일을 맞은 지난 4월말, 한국 대표팀의 응원 슬로건을 ‘We, The Reds!’로 확정했다고 밝혔다.
앞선 3월, 홈페이지와 SNS 등에서 접수한 3600여개 작품 중에서 뽑았으며 ‘Be the Reds!’에서 제출자가 문구를 착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머플러를 비롯한 각종 응원물품과 홍보제작물, 응원 구호와 응원가 등에 문구가 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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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월드컵을 앞두고 기대치가 예전보다 낮다는 이야기가 많이 들린다.
북미정상회담, 6·13전국동시지방선거 등이 같은 주에 겹치면서 월드컵 관심이 뒷전이라는 말도 나온다. 태극마크를 달면 죽어라 뛰었던 이전 세대와 달리 요즘 선수들에게서 헝그리정신이 느껴지지 않는 점도 떨어진 기대치 이유라는 지적이 있다.
정치적 배경은 제쳐두고 이외 것들은 과거에도 비슷했다.
대회를 앞두고 선수들을 향한 호평과 혹평이 뒤섞였다. 그럼에도 우리는 붉은 티셔츠를 입고 본선에서 활약하는 선수들을 위해 소리 높여 대한민국을 외쳐왔다.
골 하나에 웃고 울며 선수들과 하나 됨을 느꼈다. 어느새 같은 티를 입고 같은 곳을 바라봤다. 지난 10여 년 동안 빠지지 않았던 붉은 티는 단순한 옷이 아닌 월드컵 기간 국민을 하나로 엮어주는 매개체가 됐고, 이번에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
곽금주 교수(서울대 심리학)는 “같은 옷을 입게 되면 소속감과 동질감을 높여준다”며 “하나라는 느낌이 들게 해서 응원의 힘을 더욱 크게 만들어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에게는 집단주의 문화 성격이 아직 남아서 하나로 뭉칠 기회가 있을 때 많은 이들을 놀라게 하는 위력을 발휘한다”며 “2002년 한일월드컵 때도 붉은 티셔츠 물결이 넘쳐 전 세계의 시선을 끌었다”고 덧붙였다.
김동환 기자 kimcharr@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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