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농촌, 국제결혼, 경제적 어려움. 중학교 때는 다문화를 생각하면 이런 것들이 떠올랐어요.” 채씨는 ‘그러니까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얕보이지 않으려면 더 깨끗이 씻어야지, 더 열심히 공부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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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 서울 종로구 세계일보 본사에서 만난 채예현씨(오른쪽)와 조현주양이 다문화가족 출신으로서 학교에서 겪은 경험 등을 얘기하면서 활짝 웃고 있다. 이제원 기자 |
“저는 그다지 어려움을 겪은 건 아니지만 다문화가정에서 자라면서 이 사회의 어두운 면과 내면을 바라보게 됐어요. 그게 저의 큰 장점이더라고요. 나중에 더 자라서는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의 멘토가 되고 싶어요.”
채씨와 마찬가지로 어머니가 중국 출신인 조현주(13)양은 씩씩하게 다문화가족 자녀임을 밝혔다.
“저는 학교 친구들과 선생님 모두 엄마가 중국에서 온 걸 알아요. 친구들이 제가 중국어 잘하는 걸 인정해주고 있어요.”
조양에게 다문화는 ‘그러니까 더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 강점이었다. 친구들은 중국어나 한자가 궁금하면 조양에게 물어봤고 “중국어 잘해서 좋겠다”며 부러워했다. 완벽한 이중언어 환경에서 자라며 유치원 때 중국어보다 한국어가 부족해 따로 한글 학습지를 풀기도 했다.
“유치원에 다니는 6살 동생이 집에선 주로 한국어를 쓰더라고요. 중국어가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는데 동생이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서 지금은 집에서 중국어만 사용하고 있어요. 친구들보다 괜찮은 환경이라고 생각해요.”
조양의 적극적인 태도를 보며 채씨는 “세대가 변한 것 같다”며 웃었다.


조양은 올해 중학교에 들어갔다. 채씨가 중학생이 된 지 7년이 지났다. 7년 새 무엇이 달라진 걸까.
우선 장기 정착한 가정이 늘면서 다문화 학생이 크게 증가했다. 여성가족부와 통계청의 ‘2018 청소년 통계’를 보면 초·중·고교에 재학 중인 다문화 학생은 2011년 3만8678명에서 2017년 10만9387명으로 3배가량 늘었다. 같은 기간 전체 학생 수는 698만6847명에서 572만5260명으로 120만명가량 줄었다. 초·중·고교 재학생 중 다문화 학생 비율은 0.6%에서 1.9%로 늘었다.
수적으로 많아지면서 삶의 모습도 다양해졌다. 국제결혼을 통해 이주여성이 한국에 들어오기 시작한 초기에는 다문화가정 스스로 다문화의 장점을 살리기보다는 한국 사회에 동화하려고 애썼다. 이런 가정에서 자란 자녀는 엄마 나라의 말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조양처럼 다문화를 강점으로 인식하는 가정이 늘면서 우리 사회에 새로운 역량을 지닌 ‘다문화 신세대’가 자라고 있다.
여가부의 ‘2015 다문화실태조사’에 따르면 다문화가정 절반은 자녀를 모국으로 유학을 보낼 의향(47.1%)이 있다고 답했다. 자녀들이 목표로 삼는 교육 수준도 대학교 이상(89.7%)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젊은 부모일수록 자녀에게 2개 언어를 가르치는 비율이 높았다. 60대 이상 이주민 부모가 자녀에게 이중언어를 가르친 비율은 23.4%에 불과했지만 20∼30대 부모는 10명 중 4명 이상이 적극적으로 모국어를 가르쳤다.

◆저출산 시대 한국을 이끌어갈 주축 세대
이처럼 이중언어의 강점을 지닌 다문화 배경의 한국 아이들이 늘고 있지만 한국인의 다문화 수용성 지수는 2015년 기준 53.95점(100점 만점)으로 여전히 낮다. 다문화 수용성이란 다른 문화에 대해 편견을 갖지 않고 자신의 문화와 동등하게 인정하는 자세를 말한다.
매년 태어나는 아이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다문화 아동이 늘어나는 건 미래 한국을 이끌어갈 주축이 다문화 인구에 있음을 뜻한다. 한 해 태어나는 아이가 40만명도 안 되는 초저출산 시대에 모든 아이가 잘 성장하도록 사회 전체가 노력해야 한다. 다문화 자녀도 예외가 아니다. 그들이 차별을 겪지 않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게 더욱 지원·격려해야 하는 이유다.
김현미 연세대 교수(문화인류학)는 “현재 이중언어를 구사하는 다문화가족 구성원 수가 급증하고 있다”며 “이중언어 및 이중문화 역량은 글로벌 사회의 핵심적 자원으로 향후 그 활용도가 한층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다문화 신세대’가 향후 우리 사회에서 더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이 때문에 정부 정책도 결혼이주여성 지원 중심에서 다문화가족 자녀 정책으로 확대되고 있다. 여가부는 다문화자녀가 이중언어의 강점과 다양성에 대한 포용력을 살릴 수 있도록 한국방송통신대, 다음세대재단, 세이브더칠드런, LG연암문화재단 4개 기관과 협력해 이중언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다문화 자녀가 성장 과정에서 이중언어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하는 정책적 지원은 아직 부족하다. 김 교수는 “교육 현장에서 이중언어를 사용하는 다양한 활동을 봉사활동으로 인정해주거나 동아리 활동, 체험활동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장려해야 한다”며 “지역사회에 기여하는 자원봉사부터 이중언어를 통해 경제적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일자리까지 다양한 활용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채씨가 멘토의 꿈을 꾸게 된 것도 봉사활동을 하면서였다. 고교 시절 인근 중학교의 방과 후 프로그램 교사로 참여하며 어린 학생들에게 중국어를 가르쳤다. 그는 “제가 경험한 것들이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도움도 됐으면 좋겠다”며 “저의 직업적 꿈은 대한민국 외교관”이라고 말했다.
이현미 기자 engin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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