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아이를 키우는 많은 부모들이 그렇듯이 우리도 아이를 키우며 무척 많은 애니메이션을 봐야만 했다. 잠시도 쉬지 않고 뛰어다니며 집안을 뒤집어놓는 아이들이 애니메이션을 틀어주면 정지화면처럼 멈추기 때문이다. 그때 옆에서 한숨 돌리며 같이 보곤 했는데, 한 번 보고 끝나는 애니메이션도 있지만 대부분 한 편의 대사와 장면을 거의 외울 정도로 여러 번 본다. 취향이 맞지 않아 조금 지겨울 때, 안보면 되겠지만 이상하게도 끝까지 같이 보게 된다. 그러다 보면 가끔은 너무 재미있어 내가 더 심취해서 보는 것도 있다. 주로 집이나 공간의 표현이 뛰어난 애니메이션인데 너무 건축가 티낸다고 핀잔을 해도 어쩔 수 없다.
집이 나오는 영화 중에, 집이라는 것이 배경에 그치지 않고 하나의 캐릭터가 되기도 하고 조연이나 심지어 주연의 역할을 하는 것도 있다.
‘UP’이라는 미국 애니메이션은 결혼해서 집을 짓고 행복하게 살다가 노후에는 외국에 여행가자고 다짐했던 부부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잠시 행복하던 시절이 짧고 빠르게 흘러가고 이내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난다. 혼자 남은 남편은 그 집을 지키며 늙어간다.
그 사이 주변의 주택들이 모두 높은 건물로 개발이 되고 주인공의 집만 높은 건물 사이에서 외딴섬처럼 남게 된다. 그리고 주인공은 개발을 종용하는 개발업자의 압력을 받게 되고 결국 집을 허물어야 하는 상황에 이른다. 주인공은 집을 허무는 대신, 어느 날 헬륨가스를 넣은 풍선을 집에 엄청나게 많이 달아매고 하늘로 날아 젊은 시절 아내와 약속한 남아메리카에 있는 파라다이스 폭포로 간다. 여기에서 집은 아내의 기억을 담고 있으며, 세상에 없는 아내와 정서적으로 이어주는 다리와도 같다. ‘몬스터 하우스’라는 또 다른 미국 애니메이션에서는 아예 집이 사람처럼 감정을 드러내고 화를 내기도 한다.
‘이웃집 토토로’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에서도 집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도쿄에서 살던 아빠와 딸 둘이 사는 한 가족이 근교에 무척 오랜 집으로 이사한다. 이삿짐을 나르는 동안 세 식구가 모든 것이 낡아서 건드리면 넘어질 것 같은 집에 도착하여 집 안을 탐색한다. 그 집에는 사람은 없지만 예상하지 못한 다양한 존재들이 집 안과 주변에 살고 있었다. 아이들은 미로 같은 집 안을 뛰어다니며 무척 즐거워한다. 집을 즐겁게 탐험하다 토토로라는 나무의 정령을 만나며 신기한 모험을 한다. 여기에서 집은 적극적으로 개입하지는 않지만 든든한 배경처럼 아이들을 안아주고 위로하는 어머니 혹은 할머니와 같다.
물론 상상의 폭이 무척 넓은 애니메이션에서 가능한 이야기들이지만 모든 존재에는 생명이 있으며 특히 집 또한 하나의 생명체와 같다는 생각은 무척 공감이 된다.
개발의 가능성이 낮은 입지 때문에 근대와 현대를 거치며 많은 변화를 그대로 담고 있는 집은 십여 년 전부터 빈 채로 방치되었다고 한다. 고사리 작가 제공 |
집은 참 특별하다. 집이란 사람의 욕망이고 더 나아가서 사는 사람 자체이기도 하다.
# 집도 나이를 먹으며 스스로의 의지가 생겨난다.
나는 주로 빈 땅에 집을 새로 설계하고 짓지만 몇 번 오래된 집을 고친 적이 있다. 처음 시작은 20년 전에 서울 통의동에 있는 40년 된 집이었다. 지을 당시 유행하던 평범한 60년대 2층 양옥집이었는데, 집을 고치기 위해 들어가 보니 ‘이웃집 토토로’의 두 자매처럼 미처 생각도 못한 여러 가지 상황을 만나게 되었다. 여러 겹 덮고 있던 낡은 마감을 걷어내며 마치 도시 안에서 오래된 유적을 발굴하듯 하나씩 새로운 사실을 발견해냈다. 만만하게 시작한 집수리가 여러 가지 난관에 부딪히면서, 그 집의 시간과 타협하며 무척 어렵사리 마무리했었다.
그리고 바로 2년 뒤에 그 근처 효자동에 있는 적산가옥을 고치게 되었다. 그 집은 원래 주택이 많은 골목 안쪽에 있었던 집이었다. 그런데 청와대에서 근처의 여러 필지를 구입하여 방문객을 위한 너른 주차장을 만드는 바람에, 주변의 집들이 다 헐려나가고 그 집만 그 동네에 덩그러니 남게 된 것이었다. 마치 혼자 퇴각하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남게 된 병사처럼 외롭게 서 있던 집이었다.
집을 고치기 위해 그 안에 들어가 내부 마감재를 뜯어내고 정리를 하는 과정에서 집의 사연을 하나씩 알게 되었다. 1936년에 지어졌다는 것과, 해방 이후 얼기설기 덧붙이고 생활의 변화에 맞춰 여기저기 바꾼 흔적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다다미방에 온돌을 넣고, 부엌을 입식으로 개조하고, 화장실을 개조하며 원래의 벽이 없어지기도 하고 새로 생기기도 한 흔적, 그리고 벽지를 붙일 때 초배지로 사용된 신문지들에 배어 있던 다양한 시간들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렇게 오랜 시간 집에 붙여놓은 많은 자재와 욕망들을 다 걷어내고 원래의 뼈대만 살려놓았을 때 마치 집이 나에게 너무나 시원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때 집도 시간이 지나며 나이를 먹고 스스로의 의지가 생겨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이윽고 골목 끄트머리에 담을 살짝 헐어 만든 틈이 보였다. 그 사이로 들어가니 갑자기 넓은 마당이 나왔다. 작은 필지들이 모여 있는 동네에는 어울리지 않는 큰 정원과 고색창연한 집이었다. 마당은 넓기는 했지만 나무와 잔디와 돌들이 뭔가 조화롭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공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 안쪽에는 마당을 바라보는 오래된 집이 한 채 보였다.
차가 들어올 수 없는 좁은 골목 안에 있으니 인적이 드물어 무척 조용했고, 넓은 마당에 서 있는 집도 비에 푹 젖은 채 무척 괴괴해보였다. 대충 들은 이야기로는 낡은 집을 대상으로 한 어떤 종류의 설치미술이라 했는데, 들어와서 보기에 이곳에는 전시의 어떤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전시장 안내도 들어오는 길도 골목 중간쯤에 무척 방향이 모호한 화살표가 전부였다.
비에 젖은 초목과 땅 그리고 빈집이, 갑자기 틈을 헤집고 들어온 방문객을 놀라서 쳐다보는 듯했다. 낡은 집의 문은 다 열려 있었고 문 앞 댓돌에 신발이 한 켤레 놓여 있을 뿐이었다. 다가가서 안을 들여다보니 집 안에 신발이 몇 켤레 더 놓여 있었다. 그걸로 봐서는 집 안에 사람이 있는 것 같았지만 인기척은 전혀 들리지 않았고, 딱히 전시된 어떤 설치물도 보이지 않았다. 잘못 온 건가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무언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일단 들어가 보기로 했다.
금세 바스라질 것처럼 낡아빠진 그 집 안은 바닥, 벽, 천정, 심지어 문고리까지 비닐로 친친 감겨 있었다. 그것은 마치 어디론가 보내기 위해 집을 정성들여 포장한 것 같았다. 걸을 때마다 비닐 여러 겹이 전해주는 애매한 촉감과 더불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얼음에 미세한 균열이 일어나듯 정적을 미세하게 부수는 비닐 스치는 소리를 들으며, 사람을 찾기 위해 집 안을 이리저리 배회했다. 아주 큰 집은 아니었지만 방들과 복도와 현관이 두서없이 붙어 있어 실제보다 훨씬 넓게 느껴졌다.
작가가 감아놓은 비닐에 덮인 모든 존재는 마치 연필로 그린 그림을 손으로 문지르며 윤곽을 희미하게 한 것처럼 존재의 테두리가 애매하고 사물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물성이 모호해져 있었다. 고사리 작가 제공 |
현대의 미술은 무척 불친절해서 이해하기 힘들고 감상하기 위해서는 내가 아는 미술의 개념과 범위를 늘 조금씩 늘려가야 한다. 그리고 설명을 들으며 내가 본 것과 작가의 의도 그리고 평론가의 분석 등을 마치 시험지를 맞추듯이 맞춰나가야 한다. 뭐랄까 직관적인 아름다움보다는 상징과 개념에 대한 지적 숨바꼭질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이 집 역시 그랬다. 어둑한 실내 끄트머리에 불이 켜져 있는 곳이 있었으나 그곳은 화장실이었고 사람은 없었다. 헤매던 끝에 계단을 찾았고 그리로 올라가니 2층이 나왔다. 2층에는 사람들이 네댓 명 모여 있었다. 마치 바다에 떨어져서 혼자 표류하다 지나가는 선박을 만난 듯 반가웠다. 빈집과 말끔하게 포장이 되어 있는 내부와 그리고 종일 비가 내리며 온 세상에 퍼져 있는 축축한 공기가, 내가 아래층을 배회하는 길지 않은 시간을 한없이 늘여 놓았던 모양이다. 2층에서 나를 구조해준 사람들은 나를 부른 사람과 작가 그리고 몇 명의 관객들이었다.
그것은 ‘프로젝트 이사’라는 주제의 전시였다. 참 이상한 전시였다. 전시라는 말도 조금 이상하다. 전시가 아니고 행위이고 교류이고 무언가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 같았는데,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이 집이 언제 허물어질지도 알 수 없다. 그리고 처음에 지어질 때 부여받은 용도도 이제는 끝난 듯하다. 다만 그 집 안에는 오랜 시간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집과 주렁주렁 달고 있는 시간을 느낀다.
고사리 작가가 감아놓은 비닐에 덮인 모든 존재는 마치 연필로 그린 그림을 손으로 문지르며 윤곽을 희미하게 한 것처럼 존재의 테두리가 애매하고 사물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물성이 모호해져 있었다. 그럼으로써 이 집이라는 존재를 우리로부터 격리해준다. 우리는 격리된 채, 조금 떨어진 상태로 집과 교류한다.
집은 백년 가까이 된 일본식 목조주택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작곡가 채동선이 살았던 집인데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 가서 그곳에서 사망한 이후 어느 대학교수가 인수해서 꽤 오래 살았다고 한다. 그 사이 세상이 많이 바뀌고 교수는 퇴직하고 아이들은 장성해서 집을 떠났고, 그렇게 근대와 현대를 거치며 많은 변화를 그대로 담고 있는 집이었다.
보통의 서울 집들이라면 얼마 안 가서 밀어버리고 바로 수익성 좋은 다가구나 근린생활시설로 바뀐다. 그렇지 않고 버티게 된 것은 이 집의 입지가 개발되기 어려운 복잡한 법적 제약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이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아주 애매한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조금씩 어둠이 눈에 익듯이 집이 내 눈에 익으며 하나씩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처음 지었을 때의 목조주택의 골격과, 그 사이 벽을 늘리고 지붕을 없애고, 옥상을 만들기 위해 슬래브를 깔고 난간을 두르고, 바닥 난방을 위해 연탄아궁이를 만들고, 옆 필지를 구입해서 남쪽으로 마당을 만드는 일련의 과정이 마치 나무의 나이테처럼 선명하게 드러났다. 한때의 단란함과 한때의 행복 그리고 한때의 따뜻함이 어렴풋이 비닐을 뚫고 피어 올라왔다.
“모두가 이사를 떠난 텅 빈 곳에 홀로 남아 떠난 사람과 물건들 그리고 그 곱절의 시간을 돌이켜 보며 홀로 마지막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사를 떠난 사람들에 이어 보이지 않는 어딘가로 이사를 준비하고 있다고 느꼈고, 가정집 내부 전체를 꽁꽁 싸매며 사라져가는 공간들에 대한 염(殮)과 같이 공간을 보내기 위한 준비를 꾸준히 해나갔다. …하루에도 수십 채가 무너지고, 수십 채가 지어지는 시대를 살아가며, 긴 세월 공간이 품어온 삶의 기억과 흔적의 관계들을 너무 쉽게 잃고, 너무 쉽게 잊는 것은 아닐까?” - 작가의 말 중 -
세상이 발전하고 나라의 경제력이 높아지면서, 집이란 늘 잠깐 거쳐 가는 곳이며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디딤돌 정도로 생각되고 있다. 그곳에는 아무런 추억도 감정도 없다. 우리는 쉽게 들어가고 쉽게 나온다.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산다는 생각이 든다.
비에 젖어 후줄근한 건물과 거무튀튀해진 나무들을 뒤로하고 나오며, 저 집이 이대로 무너지지 않고 비워졌던 시간들을 조금씩 채우며 다시 살아나기를 축원해주었다.
임형남·노은주 가온건축 공동대표·『내가 살고 싶은 작은 집』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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