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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의 아들이자 효종의 동생이었던 낙선군 이숙의 묘지. 그는 당대의 공신인 김자점의 역모와 어머니 귀인 조씨의 저주사건에 연루되면서 귀양을 가는 등 굴곡진 삶을 살았다. 연천군 제공 |
임금인 아버지와 형의 사랑을 받는 귀공자였으나 두 가지의 큰 사건이 얽히면서 정국이 소용돌이쳤고, 왕자의 운명도 크게 바뀌었다.
◆인조의 아들이 역모에 연루되기까지
1651년, 김자점의 옥사가 있었다. 김자점은 정사공신 1등에 선정된 공신으로 인조 정권의 핵심 인물이었다. 인조 당대에는 여러 사건에 연루되어 부침이 있었지만 꾸준히 인조의 신임을 받았다. 인조 말년에는 서인 내에서도 공서파의 좌장으로 정국을 주도했으며, 인조의 유일한 딸인 효명옹주를 손주 며느리로 들여 궁중과도 긴밀한 결탁을 맺기도 하였다. 김자점은 인조 말년 영의정을 지내고, 낙흥부원군에 봉작되는 등 관원으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영예를 모두 거쳤다.
그러나 김자점은 충심을 다한 군주, 인조의 죽음과 함께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효종은 산림을 대거 중용하는 정책을 폈고 이에 따라 반청(反淸)적 성향을 지닌 서인 계통의 산림이 조정에 대거 유입되었다. 김상헌, 송시열, 송준길, 윤휴 등이 반청 산림의 대표였다. 결국 김자점은 모반의 죄명으로 멸문의 화를 입었다. 김자점의 옥사는 단순한 역모사건이 아니라 정치세력 간의 역학관계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효종의 즉위와 함께 산림과 대간은 김자점을 사치와 교만 방자한 자라고 성토하였고 결국 광양 유배를 관철했다.

조인필의 역모에 연루된 인물은 김자점을 포함하여 그 아들과 손자들이었다. 처음에 부인하던 모역 사실도 결국 자복하여 숭선군을 추대하려는 역모가 있었음이 밝혀졌다. 결국 김자점과 그의 세 아들, 손자 김세룡이 처형되었다. 연이어 귀인 조씨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효명옹주는 귀양을 가게 됐다. 조인필도 고문을 받던 중 사망하였으며, 그 아들도 처형되었다. 그 외에도 다수의 인물이 같은 운명을 맞았다.
이때 역모에 추대자로 거론된 숭선군과 낙선군은 모두 강화도에 위리안치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사실 숭선군과 낙선군은 이때 나이 12살, 10살에 불과했다. 이들은 단지 저주사건과 김자점의 옥사 속에서 이름이 거론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역적이 되었던 것이다. 의정부에서는 “숭선군은 역적의 초사에 추대하기로 여러 차례 거론되었고, 낙선군은 기상이 높다고 칭해진 사실이 있다”고 하며, 반드시 섬에 안치시킬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효종은 낙선군 나이가 어려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라면서 한 명이라도 구제하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두 왕자는 강화도로 유배갈 수밖에 없었고, 이에 따라 이들의 작호는 자연스럽게 환수되었다. 이제 인조의 아들이자 왕자였던 낙선군은 단지 이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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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왕자들은 태를 봉안하는 태실을 조성할 정도로 귀함을 받았으나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정국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큰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사진은 월산대군 이정의 태실. |
이숙이 17세 되던 해였다. 또래에 비하여 혼인이 많이 늦어졌다. 역모에 연루된 죄인이었기 때문이다. 유배생활은 1656년(효종 7)에 끝나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여전히 죄인의 신분이었다. 형인 숭선군은 역모가 발생하기 전 10살의 나이에 이미 혼례를 올렸지만, 낙선군은 그러지 못했다. 이숙의 방환은 혼인을 위한 효종의 배려이기도 하였다. 봉작된 신분으로 혼례를 치른 숭선군과 비교했을 때 삭탈된 이숙의 혼례는 자연히 신분상의 차이가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사실 효종은 숭선군과 낙선군을 서울로 불러온 직후부터 봉작을 회복할 것을 명하였으나 신료들이 강경히 반대하여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결국 낙선군은 봉작도 되지 못한 채 혼례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임진왜란 이후 고증할 책이나 자료가 사라진 상황에서 이숙의 처지에 맞는 혼례를 치르는 것은 모든 사안이 논란일 수밖에 없었다. 이숙은 인조의 아들로서 왕자였지만 역모에 연루되어 폐서인된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이숙은 서인의 예로 혼례를 치러야 했을까. 형제였던 효종이 왕으로 있는 상황에서 동생인 이숙의 혼례를 서인의 혼례로 치르는 것은 왕실의 위엄을 생각할 때 쉽게 결단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결국 낙선군의 혼례는 기존 왕자군의 혼례와 비교했을 때 간택의 방식을 달리하였고, 혼례의 진행에 국가임시기구인 가례청을 설치하지 않았으며, 혼례 의절을 감소하고 혼례 물품을 감손시켰다.
차등을 보인 낙선군의 혼례는 순탄할 수 없었다. 금지옥엽으로 키운 딸을 누가 역적에게 시집보내겠는가. 왕자가 아니어서 간택 방식도 정상적이지 않았지만, 현직 관원들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딸을 낙선군에게 시집보내려 하지 않았다.
효종은 아무리 역적이지만 자신의 동생이자 인조의 아들인 낙선군의 혼사에 간택단자를 넣지 않는 조정 대신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결국 한성부 관원들이 서울의 사대부 집안을 일일이 찾아가 단자를 수합해서 적합한 후보자 2명을 찾아냈고 김득원의 여식이 낙선군의 부인으로 간택되었다.
간택 이후 혼례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가례청을 설치하여 국가적으로 혼례를 도와주어야 했다. 그러나 낙선군은 왕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가례청을 설치하지 못하고, 단지 인평대군과 예조가 상의해서 혼례를 처리하게 하였다. 자연히 혼례에 동원되는 의절도 감소되고, 물력도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이는 왕의 아들이면서 왕자로 봉작되지 못한 특수한 위치에 있던 낙선군의 상황을 말해주기도 하며, 한편으로 왕실에서 차등을 통해 구현하고자 했던 조선의 통치 질서와 국가적 이념을 명백히 알려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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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오룡리귀부’(시도유형문화재 제61호)는 인조의 아들 숭선군의 신도비를 세우기 위해 만든 것이나 비를 세우지 못하고 중단되어 귀부만 남은 것이다. 역모에 연루되어 귀양까지 가야 했던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보여주는 듯하다. |
이숙은 혼례를 치른 2년 뒤, 작호가 회복되어 낙선군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효종은 숭선군과 낙선군을 서울로 불러온 후부터 지속적으로 작호를 회복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여러 신하들의 반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이들이 서울로 돌아온 것만으로도 은덕을 베푼 것인데, 관작 회복까지는 무리라는 것이었다. 효종은 세월이 이미 많이 흘렀고, 따지고 보면 숭선군과 낙선군의 경우 법을 어긴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작호 회복이 합당하다고 설득했다. 효종은 이들이 관복과 의장도 없이 돌아다니는 모습에 몹시 안쓰러워했다. 특히 동생인 인평대군의 상을 당한 와중에 이숙이 관복을 입지 못하고 대궐에 들어오는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결국 숭선군과 낙선군은 효종의 이와 같은 노력으로 작호를 회복하였다. 효종은 “작호를 회복시킨 뒤에 그들이 복장을 갖추고 궐내를 출입하니 내가 매우 기쁘다”고 하였다. 작호가 회복된 이후에는 생계를 도와주기 위해 노비와 토지를 하사하기도 했다. 효종은 이들의 작호를 회복해준 그 해에 사망했고, 이어 아들 현종이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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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영훈 한국학중앙연구원 전문원 |
나영훈 한국학중앙연구원 전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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