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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한고개, 두고개… 쉬엄쉬엄 가시게

입력 : 2018-03-16 10:00:00 수정 : 2018-03-14 20: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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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가 걷는 길 ‘문경새재’ / 살랑대는 봄바람 얄미워 찌푸린 얼굴로 봄눈 펑펑펑… 뭐가 그리 아쉬운지 동동동 이번 겨울은 유난했다. 춥기도 매우 춥더니만 쉽게 떠나지도 않았다. 뭐가 그리 아쉬운지 마지막까지 자신의 존재를 제대로 각인시켰다. 봄이 문턱을 넘었음에도 겨울에도 눈 구경이 쉽지 않은 지역에 봄비 대신 ‘봄눈’을 쏟아냈다.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쿨’하게 남기고 떠난 건지, 마지막까지 지질하게 흔적을 남긴 것인지 애매하지만, 이번 겨울은 뇌리에 깊숙이 박힐 듯싶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좋았다’는 드라마 ‘도깨비’의 대사처럼 도깨비가 심술을 내 비가 내리거나 눈이 쏟아진 데도 걷기 좋은 길은 언제 찾아도 좋은 법이다. 그만의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경상북도와 경상남도를 합쳐 영남(嶺南) 지방이라고 한다. 고개 남쪽 지방을 말하는 영남의 그 고개는 경북 문경의 조령(鳥嶺)을 말한다. 조령이 바로 문경새재다. 한양과 부산 동래를 잇는 약 380㎞의 영남대로에서 가장 높은 고갯길이 문경새재였다. 새재는 새조차 힘들게 넘나들 정도로 높고 험하다 해서 이름 붙었는데, ‘억새(草)가 우거진 고개’, ‘새(新)로 뚫린 고개’, ‘하늘재와 이화령 사이(間)의 고개’라는 뜻도 담겨 있다.

일제강점기 때 조성된 이화령길은 고속도로가 건설된 후로 자전거 마니아들이 찾는 한적한 길이 됐다.
동래에서 한양까지 가는 길에는 문경새재를 포함해 세 갈래의 큰 재가 있었다. 경북 영주에서 단양으로 가는 죽령, 경북 김천에서 충북 영동 황간으로 넘어가는 추풍령이 다른 고갯길이다. 문경새재는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한양을 갈 때 지나간 길이다. 죽령이나 추풍령보다 시간을 단축하는 이점도 있지만 ‘죽령을 넘으면 죽죽 미끄러지고,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는 속설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비들이 걷던 험한 길을 걷는 것이 아니다. 영남의 제1관문 주흘관부터 제3관문 조령관까지 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잘 정비된 길을 걷는 것이기에 남녀노소 누구나 편하게 거닐 수 있다.

문경새재 제1관문 주흘관은 새재의 3개 관문 중 규모가 가장 크고 원형도 잘 보존돼 있다. 이 문을 통과해야 새재길이 시작된다.
주흘관은 새재의 3개 관문 중 규모가 가장 크고 원형도 잘 보존돼 있다. 이 문을 통과해야 새재길이 시작된다.

‘태조 왕건’, ‘뿌리 깊은 나무’, ‘대왕 세종’ 등 인기 사극을 촬영한 세트장을 지나면 마사토가 깔린 폭 3~4m 황톳길이다. 옛날 나그네에게 편의를 제공하던 조령원터, 도적떼와 여행객이 번갈아 쉬어갔다는 마당바위, 시장기와 여독을 풀던 주막 등을 만난다. 이어 새재 계곡과 건너편 산봉우리를 조망할 수 있는 교귀정에 이르는데, 신·구 경상감사가 인수인계를 하던 곳이다. 순수 한글 비석인 ‘산불됴심’ 표석까지 지나면 제2관문 조곡관에 다다른다. 주흘관에서 조곡관까지는 3㎞ 정도로 길이 완만한 반면, 조령관까지 3.5㎞ 구간은 상대적으로 가파르다. 조령관을 지나면 충북 괴산이다. 새재길을 걷다 보면 중간중간 옛길 가는 길 표시를 볼 수 있다. 선비들이 진짜 새재를 넘던 길은 바로 그 길이다.

최대한 옛 모습을 보존하려 했다고 해도 문경새재는 걷는길이 옛 길이 아니기에 매력이 떨어질 수 있다. 문경의 다른 길들은 옛 모습이 남아 있어 오히려 걷는 맛은 더 나을 수 있다.

문경읍 관음리와 충북 충주 상모면 미륵리를 잇는 하늘재 옛길이 대표적이다. 기록에 남아 있는 백두대간을 넘는 최초의 고갯길로 신라 때인 156년 개척됐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아달라이사금 3년(156년) 4월에 계립령로를 열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어 2년 뒤인 158년에 죽령을 열었다.


충북 충주에 있는 하늘재 표지석.
2000년 가까운 역사를 지닌 하늘재는 포암산(962m) 자락에 위치한 고개로 신라가 북쪽으로 향하려면 이 고개를 넘어야만 했다. 지금이야 그리 높지 않은 고개지만 당시 기준으로 고개가 하늘과 맞닿은 듯 높은 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역사가 오랜 만큼 많은 얘기를 품고 있다. 통일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고려 왕건에게 항복할 때 마의태자가 여동생 덕주공주를 데리고 울면서 넘은 고갯길이 이 길이다. 궁예는 상주를 치러갈 때 이 길을 넘었고, 홍건적을 피해 안동으로 향하던 고려 공민왕의 피란 행렬도 하늘재를 넘었다.

문경새재 계곡과 건너편 산봉우리를 조망할 수 있는 교귀정은 신·구 경상감사가 인계인수를 하던 곳이다.
포암사에서 하늘재 정상석이 있는 곳까지 차로 갈 수 있다. 이곳부터 1㎞ 정도를 걸어 내려가면 되는데, 충주 땅을 걷는 길이다. 하늘재 반대편에선 충주 미륵대원지를 만난다.

하늘재에 이어 문경새재가 신작로가 됐지만, 일제강점기 때 이화령길이 뚫리면서 새재도 옛길이 돼버렸다. 이화령은 문경과 괴산을 잇는 고개였는데, 일제가 1925년 한반도 신작로화를 명분으로 이화령에 차량이 다닐 수 있는 도로를 개설했다. 이화령 역시 중부내륙고속도로 건설로 지금은 자전거 마니아들의 성지로 바뀌었다.

토끼비리와 이어진 고모산성.
토끼비리 역시 문경에서 빼놓을 수 없는 옛길이다. 영남대로의 한 구간인 토끼비리는 깎아지른 듯한 바위산을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파서 만든 길이다. 영남대로에서 가장 험한 구간으로 알려졌다. 남쪽 정벌에 나선 왕건이 이곳에서 길이 막혔을 때 토끼가 벼랑을 타고 달아나면서 길을 열어줘 진군할 수 있었다고 해서 토끼비리란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비리’는 낭떠러지를 뜻하는 벼루의 경상도 방언이다. 바위를 파서 만든 길이지만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많은 나그네가 밟아 바위를 닳게 해 반질반질 윤이 날 정도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문경=글·사진 이귀전 기자 frei5922@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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