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30일 세계일보 회의실에서 진행된 여성 대담에서 미혼인 세계일보 김라윤 기자가 자기 소개를 하자 대담에 참여한 다른 여성들이 순간적으로 탄성을 질렀다. “이야∼ 부럽다.”
이들이 ‘싱글 라이프’에 환호한 건 남편 때문도, 아이 때문도 아니었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결혼하지 않겠다거나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삶의 갈림길에서 ‘임신과 출산을 겪으며 경력단절 여성이 될 줄 미리 알았다면, 부실한 보육·교육 시스템을 여성의 희생에 기대 보완하려는 이 사회의 민낯을 보다 빨리 알았다면, 나의 인생을 위해 더 신중하게 선택했을 텐데’라는 아쉬움의 토로였다.

이들이 느끼는 어려움은 오늘날 결혼·출산을 선택한 여성 대다수가 겪는 시련이다. 이 어려움을 방관하는 한 우리 사회에서 자녀와 함께하는 삶을 포기하는 사람들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경력단절 여성 2명과 직장맘 1명, 미혼여성 1명이 모여 구성원들의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현실을 들여다봤다.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서현경(가명, 이하 서)= “남편이랑 같은 대학을 나왔고 같은 일을 했다. 둘 다 항해사였다. 결혼 후 바로 아이가 생겼는데 조산기가 있어 6달을 누워 지냈다. 당시 사내 문화로는 더 이상 회사를 다닐 수 없었다.”
윤희정(가명, 이하 윤)= “경력단절의 변곡점은 출산이었다. 대학원 과정을 마치지 못했는데 아이가 태어나면서 전업주부가 됐다. 첫애의 초등학교 입학과 둘째 출산까지 이어지며 이제는 빼도 박도 못 하게 됐다.”
강동영(이하 강)= “저는 친정엄마 찬스를 썼다. 엄마가 도와주시고 자녀가 1명이다보니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많은 갈등을 했다. 교육 문제를 풀지 않는 한 저출산 문제는 답이 없다. 이 정도 안 가르치고 못 해줄 거면 차라리 아이 낳지 말고 나를 위해 쓰겠다는 젊은이들의 마음이 이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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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으로서 겪는 결혼·출산·육아의 부담 속에서 ‘싱글 라이프’의 삶이 부럽기만 한 윤희정·강동영·서현경·김라윤씨(왼쪽부터)가 최근 세계일보 회의실에서 만나 마음속에 담아 온 얘기들을 풀어 내고 있다. 이제원 기자 |
윤= “공교육은 ‘집에서 어디까지 가르쳐오세요’라고 알려주는 시스템인 것 같다.”
서= “한글을 안 가르치고 초등학교에 보내면 담임에게 전화가 온다. 한글 하나도 안 가르쳤어요? 얘만 수업을 못 따라가요, 라고. 선행학습을 안 할 수 없는 구조다. 주변을 보면 중학교에 생긴 자유학기제 때문에 부모들이 사교육을 더 시킨다. 시험도 없고 수행평가로만 진행하니까 불안한 거다. 돈과 여력 있는 사람들은 더 투자하고 반대의 경우는 학교를 제대로 다니는지도 모르면서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

강= “육아의 어려움을 이야기 하다보면 최정점에 교육 문제가 있다. 직장맘이다보니 아이의 친구 엄마들과 친해질 기회가 적어 모임에 가봤는데 너무나 숨이 막혔다. 내 아이를 그들 기준으로 평가하고 ‘왜 거기 학원에 다니냐?’며 나의 선택을 B급으로 절하하더라. 그 시달림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서= “나를 위해서 해주는 말인 것처럼 정보를 제공하고 그룹핑(자녀의 공부 모임) 잡으려는 사람들이 많다. 저는 방과 후 영어 수업을 보냈는데 왜 학원을 안 보내냐고 주변에서 계속 물어봤다.”

강= “그룹핑을 주도하는 엄마는 최적의 친구를 고른다. 다툼이 없고 너무 공부를 잘해 자기 애 기죽이지도 않는 적당한 아이들을 찾는다. 그걸 알면서 들어가기도 참 이상하다. 저는 선행학습 대신 도자기 수업과 보컬 학원에 보내는데 주변에서 미친 거 아니냐고 했다. 예체능을 하더라도 기본(영수 선행학습)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는 귀를 확 닫기로 했다. 어른들은 스트레스 받을 때 술이라도 마실 수 있지만 아이들은 그럴 수 없지 않나. 아이가 청소년이 되기 전에 스트레스를 풀 돌파구를 마련해주고 싶었다. 취미를 무시하면 안 된다.”
윤= “본인의 정보력을 과시하며 자녀 교육에 매달리는 사람들이 많다.”
강= “그런데 엄마들 탓만도 아니다. 엄마가 잘 키워야 아이가 잘 된다고 여기는 사회적 시선이 있는데 엄마들이 어떻게 교육에 투자를 안 할 수 있겠나.”
윤= “맞다. 아이의 학업 성과가 내 성적표가 아닌데 못 따라가면 나의 ‘근무태만’으로 여기는 주변 분위기가 있다. 학교에서도 미리 배워오는 걸 가정하고 가르치니 사교육을 안 할 수 없고 전업주부인 내가 안 나설 수가 없다. 보육과 교육의 질이 부모의 기대에 못 미치는 부분을 여성의 희생으로 메우고 있다.”

김라윤(이하 김)= “저는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셨는데 제 성적이 떨어졌을 때 주변에서 ‘쟤네 엄마가 집에 신경을 안 쓴다’고 주변 사람들이 수근대서 엄마가 일을 그만두려 한 적도 있었다.”
◆남편은 마음만, 몸은 늘 회사에
서= “남편의 회사에서 이제 여성은 아이 문제로 일찍 퇴근하기도 하지만 남자에 대해서는 여전히 용인을 안 한다. 싫어하는 분위기다. 이것도 남녀차별인데…. 그렇다보니 남편이 매일 늦게 들어와서 평일에는 볼 기회가 별로 없다. 애 아빠가 안쓰럽기도 하다.”
윤= “남편에게도 양육 역할이 부여돼야 하는데 주말에도 출근할 때가 많다. 육아 참여도가 떨어지다보니 아이에 대한 주요 결정에서 남편이 배제될 때가 많다. 한 때 큰 애가 제 배 위에서만 자는 걸 보고 남편이 부러워했다. 임신·출산으로 경력단절을 겪는 여성의 문제가 남성에 대한 불평등으로 이어지는 거다. 남편도 회사생활이 힘들어 그만두고 싶을 때가 있을 텐데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저는 그만두라고 할 수가 없고 이 사람도 억지로 견딜 수밖에 없다.”
강= “바깥일도 집안일도 남녀가 나눠서 해야 하는데 지금은 한쪽으로 쏠려있다보니 모두 힘들다.”
윤= “이 아이는 나중에 커서 사회구성원으로서 세금도 낼 텐데 왜 나 혼자 다 짊어져야 하나, 우울해질 때가 있다. 저는 모성을 갖고 태어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제가 아이에게 밥을 먹이다보니까 더 잘 먹이는 사람이 됐을 뿐이다. 남편이 아이를 돌봤다면 남편이 더 잘했을 것이다. 지금 구조에서는 제가 고용주라도 임신·출산을 겪는 여성보다는 남성을 뽑을 것 같다. 여자가 육아로 1년 쉬면 남자에게도 그만큼 권리를 줘야 한다.”

◆세계일보 창간호 설문조사에서 30대 여성의 성역할 고정관념이 높게 나타났다. 왜 그럴까.
강= “결혼적령기라 그렇지 않을까. 저도 그 시점에 향후 잠정적 퇴직을 생각하면서 남편이 더 벌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제가 더 버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 그랬던 것 같다. 나이가 드니까 누가 되든 더 많이 벌면 좋은 거지라고 생각하게 됐지만.”
김= “30대가 기로에 서 있기 때문인 것 같다. 20대의 경우 ‘나라면’ 이라는 가정으로 말하지만 30대 여성은 임신·출산으로 경력단절을 겪거나 승진에 제한을 받을 수 있는 입장이지 않나. 상대방을 통해 벌충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윤= “30대에 사회적 잣대를 더 받아들이게 되는 듯하다.”

◆남성의 정시 퇴근부터 보장하라
윤= “경력단절 등 여성에 대한 불평등은 남성을 더욱 힘들게 한다. 저는 가끔씩 프리랜서로 일을 하는데 고용이 불안정하다보니 남편이 일을 쉴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예전에는 아이와 관련해 제게 모든 걸 맡기는 남편이 밉기도 했는데 요즘에는 오히려 미안해진다.”
강= “우리 사회는 자녀의 양육, 교육 등 모든 과정을 엄마에게 책임 지우고 있다. 이 어려운 문제의 첫 단추를 퇴근시간에 대한 규제로 시작하면 어떨까 싶다. 저는 예전 직장의 연봉이 지금보다 높았지만 일가정양립이 보장되는 지금이 훨씬 좋다. 지금 직장(롯데시네마)에서는 저녁 6시면 모든 근로자의 PC가 꺼진다. 그때부터는 회사에 있어도 놀아야 한다. 퇴근 시간에 근로자들을 회사에서 내쫓아야 아빠의 양육 참여가 늘고 변화가 시작될 수 있다.”
김= “이제는 창의성이 중요한 시대인데 밤 11시까지 회사에 있을 필요가 있나. 외국계 회사 중에는 일이 많으면 재택근무를 하라는 곳들이 있다. 일의 성과를 평가하는 기준도 바꿔야 한다.”
서= “내가 결혼하고 아이 낳았을 때는 이런 토로조차 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점점 더 긍정적 방향으로 변했으면 좋겠다.”
이현미 기자 engin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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