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칠이 사랑한 폴 로저(Pol Roger) 하우스 방문기
폴 로저 5대 손 위베르 드 빌리 단독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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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로저 하우스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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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풍스런 가구로 꾸며진 폴 로저 하우스 응접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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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로저 5대 손 위베르 드 빌리. |
동화 같은 예쁜 정원을 배경으로 건물 풍경을 렌즈에 담느라 정신없는 기자에게 풍채 좋은 한 남자가 다가옵니다.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그는 폴 로저의 5대 손 위베르 드 빌리(Hubert de Billy). 2016년 11월 서울에서 빌리를 인터뷰한 이후 두번째 만남은 그렇게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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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로저 블랑 드 블랑 빈티지. |
그와 함께 시음한 첫 샴페인은 폴 로저 블랑 드 블랑(Blanc de Blanc) 2008 빈티지입니다. 블랑 드 블랑은 ‘흰색에서 흰색이 나왔다’는 뜻으로 화이트 품종인 샤르도네 100%로 만든 샴페인을 말합니다. 피노 누아 등 레드 품종으로만 만들면 블랑 드 누아(Blanc de Noir)라고 하죠. 상파뉴에서도 최상급 재배지로 손꼽히는 그랑크뤼 마을 오제(Oger), 크라망(Cramant), 와리(Oiry), 아비즈(Avize), 쇼우이(Chouilly)에서 수확한 샤르도네로만 만듭니다. “2006년은 더워 부드럽고 잘익은 포도를 얻었어요. 반면 2008년 시원해 차갑고 날카로운 산도의 포도가 재배됐죠. 2008빈티지는 차갑게 시작해서 온도가 올라가면서 변하는 풍미를 즐기기에 딱 좋아요. 그랑크리 마을 포도밭이 5개나 들어간 최고급 샤르도네로 빚었답니다”.
주목할 것은 숙성기간입니다. 보통 샴페인은 2년동안 병숙성합니다. 농사가 아주 잘돼 품질이 뛰어난 그해 포도로만 빚는 빈티지 샴페인은 3년 정도 숙성하죠. 그런데 이 샴페인은 무려 7년을 숙성합니다. 샴페인의 최고봉으로 불리는 돔페리뇽이 8년을 숙성하니 비슷한 숙성기간입니다. 생산량은 매우 적고 한국 시장에도 연간 120병만 들어옵니다.
샴페인의 숙성기간은 왜 중요할까요. 샴페인을 만들때 1차 발효를 통해 만든 베이스 와인을 매해 빈티지별, 마을별, 품종별로 따로 보관해요. 이 와인들을 그해 생산된 포도로 만든 와인 60% 정도와 맛있게 섞는 아상블라주를 거칩니다. 이어 와인을 효모와 당분과 함께 병에 넣어 2차 발효에 들어갑니다. 탱크가 아닌 병에서 2차 발효를 하는 것은 공간이 좁은 병에서 발효하면 버블이 서로 끼이면서 미세하고 부드러운 버블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랍니다. 효모는 당분을 먹고 알코올과 CO2를 만들어내는데 알코올 도수는 1∼1.5도 더 올라가고 6기압 정도의 기포를 만든 뒤 효모는 역활을 마치고 죽게됩니다. 이 죽은 효모와 함께 병숙성을 계속하는데 이를 쉬르리(Surlee), 리 숙성이라고 합니다. 바로 이 과정에서 효모자가분해가 일어나며 효모의 풍미가 샴페인에 녹아들게 되죠. 오래 숙성할 수록 구수한 빵이나 브리오슈, 갈변된 사과향, 견과류의 풍미가 깊고 그윽해 지기때문에 샴페인은 병숙성 기간이 매우 중요하답니다. 돔페리뇽 P2는 무려 16년을 숙성하고 폴 로저이 최고급 샴페인 뀌베 서 윈스턴 처칠(Pol Roger Cuvee Sir Winston Churchill)은 보통 8∼10년동안 병숙성하는 이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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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로저 브륏 빈티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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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로저 뀌베 서 윈스턴 처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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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로저 로제 브륏 빈티지. |
폴 로저 로제 브륏 빈티지(Pol Roger Rose Brut Vintage) 2008은 샤도네이와 피노 누아로 만든 로제 샴페입니다. 7년 숙성 뒤 출시됩니다. 폴 로저는 특별히 좋은 빈티지에만 그 명성에 걸맞는 최고급 로제 빈티지 샴페인을 선보이는데 약 20여개의 그랑 크뤼와 프리미에 크뤼 마을의 포도밭에서 수확한 피노 누아와 샤르도네로 만듭니다. 몽따뉴 드 랭스 지역의 부지(Bouzy)에서 수확된 피노 누아로 만든 레드 와인을 15% 정도 블렌딩해 매혹적인 핑크빛 컬러를 탄생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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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로저 리치 데미 섹. |
폴 로저 리치 데미 섹(Pol Roger RICH Demi Sec )은 폴 로저 하우스의 모든 샴페인 중 유일하게 부드러운 달콤함을 살짝 느낄 수 있는 넌빈티지 샴페인입니다. 샴페인 공정의 마지막 단계인 도사쥬(Dosage)때 약 35g/L의 포도천연당분(Cane)을 첨가해 과하지 않으며 섬세한 달콤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약 30개의 크뤼에서 수확된 3개의 포도품종을 33%씩 균등 블렌딩합니다. 15개월 정도 숙성시킨 베이스 와인으로 블렌딩하지만, 뀌베 리치는 적어도 3년 이상 숙성시킨 두 개의 빈티지 와인을 베이스로 블렌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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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로저 퓨어 엑스트라 브륏. |
폴 로저 퓨어 엑스트라 브륏(Pol Roger PURE Extra Brut)은 피노누아, 샤르도네, 피노 뫼니에를 동일한 비율로 블렌딩하는데 도사쥬(Dosage)때 당분을 전혀 첨가하지 않습니다. 자연 그대로의 순수한 샴페인이라 할 수 있겠네요. 폴 로저의 기본 철학을 표현하면서 동시에 ‘자연스러움, 순수’를 컨셉으로 빚어졌습니다.

폴 로저 샴페인 특징은 이처럼 오랜 리 숙성을 통해 효모 풍미를 지니면서 포도라는 과일 자체의 본성을 잃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빌리는 “포도가 모든 것을 표현해요. 되도록이면 포도로 샴페인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복잡하지 않고 샤르도네를 마실때는 샤르도네가 느껴질 정도로 포도 자체가 표현되기를 바라죠. 스틸탱크에서 발효하는 것은 이처럼 포도향만 들어가기를 원하기 때문이에요”.
최고의 포도에 집착하는 것은 바로 이런 양조 철학때문입니다. 몽타뉴 드 랭스에서 재배한 깊이 있고 바디감이 느껴지는 피노 누아, 에뻬르네 마을과 마른 계곡의 신선한 과일향이나 야채향이 개성있게 돋보이는 피노 뮈니에, 에뻬르네와 꼬뜨 드 블랑의 중심부에서 수확한 샤르도네 등이 폴 로저 샴페인 양조에 사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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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로저 샴페인 발효 탱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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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85m 깊이의 셀러에서 숙성중인 폴 로저 샴페인들. |
그를 따라 폴 로저의 샴페인 공정 과정을 둘러봤습니다. 양조장에서 들어서니 발효에 사용되는 엄청난 숫자의 스틸탱크가 늘어 서 있습니다. 와인이 익어가는 셀러는 지하 85m 깊이에 총 길이는 무려 5km에 달할 정도로 끝이 없이 이어집니다. 굉장히 어둡고 서늘한 지하 셀러에서 수백만병의 샴페인이 숙성중이더군요. 폴 로저 샴페인은 금양인터내셔날에서 수입하는데 한국으로 수출될 샴페인 29만4102병도 별도의 공간에 고이 모셔져 있습니다. “셀러는 3개층으로 이뤄졌는데 회백색의 연토질 석회암에 만들어 졌죠. 이런 지하 셀러가 샴페인의 깊은 맛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답니다”. 샴페인의 숙성에 셀러가 얼마나 중요한지 고개가 끄덕여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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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미아쥬(Remuage) 작업이 진행중인 폴 로저 지하셀러. |
병을 조금씩 돌리며 효모찌꺼기를 입구쪽으로 모으는 흐미아쥬(Remuage) 과정을 오직 수작업으로만 진행하는데 아주 어두운 셀러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반면 생산공정은 모두 전 자동으로 이뤄집니다. 압축된 코르크를 삽입하고 뚜껑과 철사로 묶는 공정부터 병목에 캡실을 씌우는 과정까지 현대화된 자동 공정 시설에서 대규모로 이뤄집니다. 특히 캡실을 씌우는 작업때 나는 소리는 마치 샴페인을 오픈할때와 비슷한 버블터지는 소리 같아요. 끈임없이 반복되는 음향을 가만히 듣고 있자면 마치 한편의 음악을 연상케 하네요.

한국을 찾은 빌리를 2017년 11월 세번째로 만났습니다. 그의 첫 마디는 충격입니다. “10월 말에 베이스 와인 600헥토리터를 모두 버렸어요. 8만병을 생산할 정도의 엄청난 양이죠. 5년전인 2102년 구매한 포도로 만든 와인인데 빈티지 샴페인으로 만들기에는 성에 차지 않는 품질로 최종 평가됐기 때문이죠. 다른 샴페인 하우스는 넌빈티지 샴페인에 블렌딩해서 만들수 있을 정도의 품질이지만 우리는 최상의 포도즙만 사용하기 다 버렸답니다. 품질은 디테일이 누적되며 완성되죠. 품질은 소비자들이 입맛에서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170년 가까운 세월동안 폴 로저가 최정상의 위치를 지킨 비결은 결국 품질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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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찾은 위베르 드 빌리. |
빌리에게 한국은 어떤 시장일까. “한국은 25년동안 장기 거래하고 있는 시장에에요. 전세계 10대 샴페인 시장에는 아직 들지 못하지만 2017년는 일본보다 빠르게 성장할 정도랍니다. 아시아권에서 홍콩이 가장 많이 발전하고 있지만 한국 경제가 성장이 지속적으로 이어지면 샴페인 시장도 함께 성장할 것으로 보고 있죠”.
실제 한국의 샴페인 시장은 급성장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프랑스 상파뉴양조자협회(Comite Interprofessionnel du vin de Champagne·CIVC)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샴페인 수입량은 2015년 71만병에서 2016년 82만5000병으로 확대돼 전년대비 증가율이 전세계 1위를 기록했답니다. 샴페인 소비량이 급증하면 보통 와인시장이 고급화되는 초기 단계로 판단한답니다. 저가 위주 와인을 찾던 한국 소비자들이 이제 고급 와인에 본격적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는 의미로 앞으로 샴페인 등 고급 와인들이 소비량 증가가 예상됩니다.
상파뉴(프랑스)=글·사진 최현태 기자 htcho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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