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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대학생 딸이 자퇴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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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12-22 21:23:59 수정 : 2017-12-22 22:4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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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싹이 움트던 지난 3월30일, 대학에 갓 입학한 딸이 학교에 자퇴서를 냈다. 처음엔 당황했지만 한 달간 대학생활을 맛본 딸의 자퇴 이유가 무척 궁금했다. 그래서 “왜 자퇴했느냐”고 물었더니 “적성이 맞지 않아서”라는 평범한 대답이 돌아왔다.

공과대학 기계공학과에 다닌 딸은 “하루 한 시간 물리수업을 듣는 것도 힘든데, 이걸 평생 마주하고 살아야 할 것을 생각하니 앞이 깜깜했다”고 털어놨다. 듣고 보니 적성에 안 맞는다는 게 꼭 자퇴의 유일한 이유는 아닌 듯했다. 적성에 맞지 않는 기계를 평생 ‘업’으로 삼기에는 적잖은 부담이 됐던 모양이다.

한현묵 사회2부 기자
부모로서 딸의 재수를 반대할 명분이 없었다. 오히려 “늦었지만 잘했다”고 등을 토닥여줬다. 이렇게 딸은 대학 입학 한 달 만에 재수의 길을 걷게 됐다. 또다시 입시생이 된 딸의 뒷모습을 보면서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라고 몇 번이고 자문했다.

딸이 대학 전공을 선택할 때가 생각났다. 아내와 내가 딸의 대학과 학과를 고를 때 가장 염두에 둔 것은 취업 가능성이었다. 적성보다는 졸업 후 취업이 잘되는 학과를 골라 원서를 내도록 했다. 당시 대학에서 취업이 잘되는 학과는 이른바 ‘전·화·기’였다. 전·화·기는 전기공학과와 화학공학과, 기계공학과 줄임말로 취업 인기학과를 일컫는다. 여학생이지만 기계공학과를 졸업하면 취업 문턱을 좀 더 쉽게 넘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딸의 이번 자퇴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적성보다는 취업을 고려해 문과가 아닌 이과를 선택하면서부터 시작됐는지 모른다. 우리 가족은 딸이 문과로 진학하면 장차 문과생의 대명사인 ‘인구론’(인문계생 90%가 논다)과 ‘문·사·철’(문학·역사·철학 등 취업 안 되는 학과) 꼬리표를 달고 다닐 것이라는 불안감에 휩싸였던 것 같다.

재수생이 된 딸은 결국 진로를 이과에서 문과로 바꿨다. 들어보니 딸처럼 이과에서 문과로 바꾼 재수생들이 의외로 많았다. 딸은 다니는 재수학원에서 전과한 친구들이 10명이 넘는다고 했다. 아무래도 취업 때문에 선택한 이과가 적성이나 흥미에 맞지 않는다는 점을 뒤늦게 깨달은 친구들이 꽤 있을 것이다.

딸의 자퇴와 재수를 지켜보면서 부모로서 자식의 관심과 역량을 살피기보다는 안정된 직장과 돈벌이만 강요하지는 않았는지 반성을 하게 된다.

얼마 전 수능 성적표를 받아들고 온 딸이 무심하게 앞으로의 진로계획에 관해 이야기를 한다. 대학이 아닌 학과부터 고를 것이며 대학, 전공을 고를 때도 취업보다는 적성부터 따지겠다는 선언처럼 들렸다. 지난 2년여간 계속된 고민과 후회가 담겨 있는 듯해서 마음 한켠이 짠했다.

아무래도 1년 뒤 딸은 ‘인구론’과 ‘문사철’의 길을 걷고 있을 것이다. 또 4년 뒤 취업하느라 고생하겠지만 나나 딸이나 ‘왜 그랬을까’ 하는 후회는 하지 않을 것 같다. 딸이 원하는 대학과 학과를 다니면서 인생의 여러 고민과 가치의 문제들, 인간과 문화의 근본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던져봤으면 한다. 그래서 여전히 ‘기승전업’을 고수하고 있는 아비에게 미처 몰랐던 여러 인생의 묘미를 일러줬으면 한다.

한현묵 사회2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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