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암흑기 보냈지만 2000년 개혁 … 9000억원 투입/유망주·자국 리그 육성 결실/한국축구도 반면교사 삼아야 1994년 미국 댈러스 코튼볼 구장에서 열린 미국월드컵 C조 3차전 후반. 전 대회 우승팀 독일 선수들이 한국에게 밀리고 있었다. 경기 초반 3득점으로 3대 2로 앞서고 있었지만 누가 봐도 졸전임이 확실했다. 참다 못한 독일 관중이 야유를 퍼붓자 당시 독일팀 에이스 스테판 에펜베르크가 격분해 관중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결국 경기는 독일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후폭풍이 컸다. 1990년대 전설적 중원 사령관 에펜베르크는 경기 뒤 국가대표에서 영구 퇴출됐다. 독일은 이 공백을 메우지 못하고 8강에서 탈락했다. 독일축구 암흑기의 시작이다.
이후에도 독일 축구의 고전이 이어졌다. 유로1996에서 예상을 깨고 우승을 차지했지만 극단적 수비축구로 비아냥만 들었고, 1998년 프랑스월드컵과 유로2000에서는 8강에서 탈락했다. 어느 순간 독일 축구에 ‘녹슨 전차’라는 별명이 붙었다. 하지만 축구팬들이 잘 모르는 것이 하나 있다. 독일축구가 암흑기를 보내고 있었지만 결코 허송세월을 하지는 않았다. 자국 축구에 한계를 느낀 독일은 1990년대 중반부터 대대적 개편을 준비했고 2000년대 들어 본격적 개혁에 나섰다. 2002년부터 10년간 9000억원이 넘는 돈을 쏟아부으며 유망주 육성에 나섰고, 지도자 양성과 훈련 시설 확충 등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여기에 유망주들이 실력을 키우는 터전인 자국 리그도 지역밀착 강화와 경기장 시설 개선 등을 통해 내실을 다져 유럽 평균 관중 1위 리그로 키웠다.
암흑기 동안 진행된 일련의 프로젝트가 내년에 한국이 맞붙을 ‘세계랭킹 1위’ 독일축구를 만들었다. 2002년 영광의 시기를 보냈던 한국축구도 지금 한창 암흑기다. 가까스로 월드컵 진출권을 따낸 것이 벌써 두 번 연속이다. 역대 전적에서 20승 이상 앞섰던 일본에는 이번 동아시안컵전에서 이길 때까지 7년이나 승리를 따내지 못했다. 이 어둠 속에서 한국 축구 갱생 프로젝트는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을까. 불행하게도 유소년축구 육성, 인프라 투자 등은 중국에 뒤지고 자국 리그 내실화도 일본 J리그보다 훨씬 뒤떨어진다. 한국축구가 탄탄해지는 징후는 나타나지 않는다.
암흑기를 버티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 얻는 것이 없다면 이후 따라오는 결과는 더욱 참혹할 수밖에 없다. 1994년 독일축구의 암흑기를 열었던, 그리고 지금은 암흑기를 걷고 있는 한국축구가 기억해야 하는 사실이다.
서필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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