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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가까웠지만 멀었던 김무성·유승민의 ‘1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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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11-07 07:00:00 수정 : 2017-11-07 14:0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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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김무성과 유승민이 갈라졌다. 바른정당 김무성 의원이 6일 동료 의원 8명과 탈당을 결정하면서 당에 남게된 유승민 의원과 당적을 달리하게 됐다. 비박(비박근혜)계의 좌장이자, 박근혜 전 대통령 경선 캠프의 ‘투 톱’이었던 두 사람이 끝내 결별했다. 10여년의 세월 동안 두 사람은 끊임없이 부딪히면서도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였다. 두 사람이 부딪히거나 협력할 때마다 보수 정치권에 파장이 일었다. 6일 김 의원 선언은 바로 그 관계가 당분간 복원되지 않음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사실 ‘두 명’의 주군을 모시고, ‘두 번’의 대선 레이스를 뛰었다. 2002년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대선 캠프와 2007년 한나라당 박근혜 후보 경선 캠프다. .재선의 김 의원은 미디어대책본부장으로 미디어 업무를 총괄했고, 유 의원은 여의도연구소장으로 이회창 후보의 정책과 연설을 설계했다. 두 사람 모두 당시에는 실무급 인재였다. 당시의 유 의원을 기억하는 한 바른정당 관계자는 “사실상 이 후보 연설을 유 의원이 홀로 책임졌다고 보면 된다. 유 의원이 집에 며칠씩 안들어가곤 했었다”고 회고했다. 5년 뒤인 2007년 박근혜 후보 경선 캠프에서는 좌장격이었다. 김 의원은 캠프 조직을, 유 의원은 정책을 책임졌다. 당시 두 사람은 ‘원조 친박’ 핵심이었다. 자연히 두 사람에 대한 친이(친이명박)계의 회유가 있었지만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두 사람은 박 전 대통령에 충성했다. 김 의원이 자신의 정치적 스승인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이명박 전 대통령을 지지하라고 하자 “각하 수하가 어디가서 배신자 소리나 들어서야 되겠습니까?”라며 거부했던 것도 유명한 일화다. 
바른정당 통합파 김영우 의원(왼쪽 다섯번째)이 6일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탈당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홍철호, 김용태, 강길부, 이종구, 김영우, 황영철, 김무성, 정양석 의원.
서상배 선임기자

이명박정부 이후 두 사람이 차례로 ‘친박’에서 떨어져 나온 것도 비슷하다. 김 의원은 2010년 친이계 지원으로 원내대표에 당선되면서, 유 의원은 2007년 경선을 계기로 자연히 박 전 대통령에게서 멀어졌다. 두 사람 모두 자신들이 ‘비박’이 된 이유로 박 전 대통령의 ‘폐쇄적’ 정치태도를 꼽곤 했다. 이명박정부하에서 두 사람의 친밀도가 드러난 적은 잘 없었다.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손을 맞추게 된 것은 2015년 원내대표 선거가 계기였다. 이완구 전 원내대표가 총리에 임명되면서 보궐선거가 치러지자 당시 대표였던 김 의원이 친박계 이주영 후보에 맞설 적임자로 유 의원과 손을 잡기로 한 것. 당시 외국에 나가있던 유 의원에게 김 의원이 전화를 걸어 “빨리 돌아오라”라고 설득했던 일화가 있다. 유 의원은 원유철 의원과 원내대표-정책위의장 러닝메이트를 구성해 당선됐다. 김 의원의 물밑 지원이 있다는 설이 파다했었다. 원내대표 선거 전 본회의장에서 ‘문건 파동’과 관련 “배후는 K, Y”라고 적혀져있던 김 의원의 수첩이 카메라에 잡히면서 큰 논란이 일기도 했었다. ‘비박의 투톱’이었던 두 사람은 이후 5개월 동안 박 전 대통령의 청와대와 때로는 긴장관계를 때로는 협력관계를 구성하며 당을 이끌어갔다.

첫 번째 ‘파탄’은 유 의원의 국회법 파동에서 비롯됐다. 박 전 대통령의 유명한 ‘배신의 정치’ 일화다. 청와대와 친박계가 유 의원을 원내대표직에서 끌어내리려 했다. 김 의원은 한 차례 그를 ‘보호’했지만, 결국 유 의원은 원내대표를 사퇴했다. 당시 사퇴를 권유하는 새누리당 의원총회 결과를 김 의원이 직접 유 의원에게 전달하며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됐나”는 말을 했었다고 한다. 유 의원의 ‘헌법 1조’ 발언이 이 때 나왔다. 두 사람간 관계에 첫 ‘금’이 난 시기였다. 다음해 총선 공천이 두 사람 관계를 ‘애증’으로 만드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한구 공천위원장을 비롯한 친박계들이 친유(친유승민계) 의원들을 ‘공천 탈락’시키면서 유 의원 탈락을 압박했는데 당시 김 의원은 대표였지만 별달리 ‘공천 학살’에 방어를 하지 못했다. 그러던 김 의원은 유 의원까지 공천에 밀리는 순간 ‘옥새 투쟁’을 벌이며 그를 구해냈다. 이 사건을 두고 유 의원측과 김 의원측의 시각은 완전히 엇갈린다. 유 의원측에서는 친유계를 전원 탈락시키고 유 의원만 생존시킨 것은 사실상 김 의원이 유 의원을 ‘고사’시킨 것에 불과하다고 지적하는 반면, 김 의원측엔 서슬푸런 박 전 대통령의 위세속에서 당 대표 사퇴까지 각오하며 유 의원을 지켜낸 것이라고 반박한다. 

그해 10월부터 터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도 두 사람은 종종 엇갈리는 행보를 보였다. 김 의원이 탄핵에 찬성하면, 유 의원이 ‘아직은 아니다’고 반대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결국 두 사람은 박 전 대통령 탄핵에 손을 잡았다. 두 사람 합의로 비박계가 결집해 박 전 대통령 탄핵이 이뤄질 수 있었다. 곧 두 사람은 바른정당을 창당해 새누리당을 떠났다. 바른정당에서도 두 사람은 좀처럼 보조를 맞추지 못했다. 대선 직전 김 의원의 보수후보 통합 권유에 후보였던 유 의원은 강하게 거부했고 그 여파로 바른정당 의원 13명이 탈당했다. 이에 대한 역풍이 불면서 유 의원의 지지율이 상승했다.

대선 후에도 두 사람은 협력보다는 갈등했다. 유 의원쪽 이혜훈 의원이 당 대표 후보로 나서려 하자 김 의원이 만류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 의원이 대표가 된 후 불미스러운 일로 중도사퇴하면서 두 사람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한때 ‘뽀뽀’까지 하며 두 사람 관계를 회복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겹겹이 쌓인 세월속에 누적된 두 사람의 심적 갈등과 불신은 결국, ‘재결합’ 보다는 ‘이혼’을 택하게 됐다. 두 사람은 지난 5일 의원총회에서 대각선에 앉으며 자신들의 감정을 우회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이도형 기자 scop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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