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사람은 사실 ‘두 명’의 주군을 모시고, ‘두 번’의 대선 레이스를 뛰었다. 2002년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대선 캠프와 2007년 한나라당 박근혜 후보 경선 캠프다. .재선의 김 의원은 미디어대책본부장으로 미디어 업무를 총괄했고, 유 의원은 여의도연구소장으로 이회창 후보의 정책과 연설을 설계했다. 두 사람 모두 당시에는 실무급 인재였다. 당시의 유 의원을 기억하는 한 바른정당 관계자는 “사실상 이 후보 연설을 유 의원이 홀로 책임졌다고 보면 된다. 유 의원이 집에 며칠씩 안들어가곤 했었다”고 회고했다. 5년 뒤인 2007년 박근혜 후보 경선 캠프에서는 좌장격이었다. 김 의원은 캠프 조직을, 유 의원은 정책을 책임졌다. 당시 두 사람은 ‘원조 친박’ 핵심이었다. 자연히 두 사람에 대한 친이(친이명박)계의 회유가 있었지만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두 사람은 박 전 대통령에 충성했다. 김 의원이 자신의 정치적 스승인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이명박 전 대통령을 지지하라고 하자 “각하 수하가 어디가서 배신자 소리나 들어서야 되겠습니까?”라며 거부했던 것도 유명한 일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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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정당 통합파 김영우 의원(왼쪽 다섯번째)이 6일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탈당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홍철호, 김용태, 강길부, 이종구, 김영우, 황영철, 김무성, 정양석 의원. 서상배 선임기자 |
이명박정부 이후 두 사람이 차례로 ‘친박’에서 떨어져 나온 것도 비슷하다. 김 의원은 2010년 친이계 지원으로 원내대표에 당선되면서, 유 의원은 2007년 경선을 계기로 자연히 박 전 대통령에게서 멀어졌다. 두 사람 모두 자신들이 ‘비박’이 된 이유로 박 전 대통령의 ‘폐쇄적’ 정치태도를 꼽곤 했다. 이명박정부하에서 두 사람의 친밀도가 드러난 적은 잘 없었다.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손을 맞추게 된 것은 2015년 원내대표 선거가 계기였다. 이완구 전 원내대표가 총리에 임명되면서 보궐선거가 치러지자 당시 대표였던 김 의원이 친박계 이주영 후보에 맞설 적임자로 유 의원과 손을 잡기로 한 것. 당시 외국에 나가있던 유 의원에게 김 의원이 전화를 걸어 “빨리 돌아오라”라고 설득했던 일화가 있다. 유 의원은 원유철 의원과 원내대표-정책위의장 러닝메이트를 구성해 당선됐다. 김 의원의 물밑 지원이 있다는 설이 파다했었다. 원내대표 선거 전 본회의장에서 ‘문건 파동’과 관련 “배후는 K, Y”라고 적혀져있던 김 의원의 수첩이 카메라에 잡히면서 큰 논란이 일기도 했었다. ‘비박의 투톱’이었던 두 사람은 이후 5개월 동안 박 전 대통령의 청와대와 때로는 긴장관계를 때로는 협력관계를 구성하며 당을 이끌어갔다.
첫 번째 ‘파탄’은 유 의원의 국회법 파동에서 비롯됐다. 박 전 대통령의 유명한 ‘배신의 정치’ 일화다. 청와대와 친박계가 유 의원을 원내대표직에서 끌어내리려 했다. 김 의원은 한 차례 그를 ‘보호’했지만, 결국 유 의원은 원내대표를 사퇴했다. 당시 사퇴를 권유하는 새누리당 의원총회 결과를 김 의원이 직접 유 의원에게 전달하며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됐나”는 말을 했었다고 한다. 유 의원의 ‘헌법 1조’ 발언이 이 때 나왔다. 두 사람간 관계에 첫 ‘금’이 난 시기였다. 다음해 총선 공천이 두 사람 관계를 ‘애증’으로 만드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한구 공천위원장을 비롯한 친박계들이 친유(친유승민계) 의원들을 ‘공천 탈락’시키면서 유 의원 탈락을 압박했는데 당시 김 의원은 대표였지만 별달리 ‘공천 학살’에 방어를 하지 못했다. 그러던 김 의원은 유 의원까지 공천에 밀리는 순간 ‘옥새 투쟁’을 벌이며 그를 구해냈다. 이 사건을 두고 유 의원측과 김 의원측의 시각은 완전히 엇갈린다. 유 의원측에서는 친유계를 전원 탈락시키고 유 의원만 생존시킨 것은 사실상 김 의원이 유 의원을 ‘고사’시킨 것에 불과하다고 지적하는 반면, 김 의원측엔 서슬푸런 박 전 대통령의 위세속에서 당 대표 사퇴까지 각오하며 유 의원을 지켜낸 것이라고 반박한다.


그해 10월부터 터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도 두 사람은 종종 엇갈리는 행보를 보였다. 김 의원이 탄핵에 찬성하면, 유 의원이 ‘아직은 아니다’고 반대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결국 두 사람은 박 전 대통령 탄핵에 손을 잡았다. 두 사람 합의로 비박계가 결집해 박 전 대통령 탄핵이 이뤄질 수 있었다. 곧 두 사람은 바른정당을 창당해 새누리당을 떠났다. 바른정당에서도 두 사람은 좀처럼 보조를 맞추지 못했다. 대선 직전 김 의원의 보수후보 통합 권유에 후보였던 유 의원은 강하게 거부했고 그 여파로 바른정당 의원 13명이 탈당했다. 이에 대한 역풍이 불면서 유 의원의 지지율이 상승했다.
대선 후에도 두 사람은 협력보다는 갈등했다. 유 의원쪽 이혜훈 의원이 당 대표 후보로 나서려 하자 김 의원이 만류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 의원이 대표가 된 후 불미스러운 일로 중도사퇴하면서 두 사람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한때 ‘뽀뽀’까지 하며 두 사람 관계를 회복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겹겹이 쌓인 세월속에 누적된 두 사람의 심적 갈등과 불신은 결국, ‘재결합’ 보다는 ‘이혼’을 택하게 됐다. 두 사람은 지난 5일 의원총회에서 대각선에 앉으며 자신들의 감정을 우회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이도형 기자 scop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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