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도심에 미지의 장소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비밀 벙커나 대통령이 피신하려고 숨겨졌던 방공호, 폐쇄된 지하철역 플랫폼까지 오랜 시간 배일에 쌓였던 장소들이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이들 '숨겨진 공간'은 언제부터 어떤 목적으로 서울 한복판에 외로이 방치돼왔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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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영등포구 여의도광장 맞은편에 위치한 지하 계단(왼쪽 사진)과 비밀 벙커의 모습. 이곳은 문화전시공간으로 꾸며져 시민에게 공개됐다. |
◆여의도 도심 속 숨겨진 던전 '지하 비밀 벙커'
지난달 19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광장 맞은편에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하나 생겼다. 이를 따라 내려가면 지하 공간이 나오는데, 이런 사실이 대중에게 알려진 건 지난 2005년 여의도 버스환승센터를 건설하는 과정에서였다. 발견 당시 물이 가득 차있던 의문의 벙커는 약 595㎡(180평)에 이르는 너른 공간과 66㎡(20평) 남짓한 방으로 이뤄져 있었다.
당시 이 공간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었다. 서울시는 비밀을 풀려고 여의도 항공사진을 뒤져 관련 기록을 찾았고 1977년 11월 벙커 출입구 쪽에서 의문의 공사를 하고 있는 장면을 포착할 수 있었다. 벙커 위치는 당시 국군의 날 사열식 단상이 있던 자리와 일치했다. 이에 따라 행사 때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안전을 위해 지어진 경호실 비밀시설이 아닐까 하는 추정이 나왔다.
이 벙커는 현재 문화전시공간으로 꾸며져 시민에게 공개됐다. 벙커 안 하얗게 칠해진 벽과 바닥 타일은 당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지만 각종 전시 작품과 여의도 역사에 대한 소개를 담은 안내물이 들어서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다. 박 전 대통령을 위한 공간으로 추정되는 'VIP'실에는 발견 당시의 고급스런 소파와 화장실이 그대로 보존됐다.
‘여의도 벙커’로 불리다 이제는 ‘SeMA(Seoul Museum of Art) 벙커'라는 근사한 명칭으로 바뀌었다. 매주 월요일 휴관하며, 나머지 요일은 오전 10시~오후 6시 무료 개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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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역사박물관 주차장 오른편에 위치한 '경희궁 방공호' 입구의 모습. |
◆일제강점기 전투기 공습을 대비해 만들어진 '경희궁 방공호'
서울 종로구 역사박물관의 주차장 오른편에도 의문의 공간이 존재한다. 하얀색으로 칠해진 콘크리트 건물 중앙의 철문을 열면 지하 깊숙이 내려가는 계단이 등장한다. 직선으로 100m가량 내려가면 10여개의 작은 방들이 등장한다. 어둡고 스산한 이 정체불명의 장소는 이른바 ‘경희궁 방공호’라 불린다.
이곳은 일제 강점 말기 비행기 공습에 대비해 만들어진 방공호로 추정된다. 이전에는 통신시설(경성중앙전신국 별관 지하전신국)이 있었던 걸로 알려졌다.
방공호에 들어서자마자 비상 경보음과 비행기 폭격 소리가 시끄럽게 귓전을 때리며 사방에 울려 퍼진다. 당시 환경을 반영해 일제 강점기 참상을 간접 체험할 수 있도록 서울시가 마련한 음향장치에서 비롯된 효과음이다. 이곳에는 관련 영상장치도 설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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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인근의 '경희궁 방공호' 내부 모습. 일제 강점기 공습 현장의 모습이 연출됐다. |
일부 영상 시설 말고는 대부분이 발견 당시 상태로 보존됐다. 오래된 콘크리트 벽면과 습기로 생긴 구멍, 샤워장 모습까지 그대로라고 한다. 10여개의 방 중 3곳은 일제시대 관련 영상 감상과 폭격 상황 체험을 위한 공간, 타일 속에 얼굴이 비치는 포토존 등으로 꾸며졌고, 나머지는 비어있는 상태다.
지난달 19일부터 관람 희망자를 상대로 사전 신청을 선착순으로 받았는데, 비밀 아지트에 대한 궁금증에 시민들이 몰려 내달 26일까지 예약이 며칠 만에 꽉 찼다. 현재는 마감됐다.
서울역사박물관 측 관계자는 “안전상의 이유로 제한된 인원을 받았으나 추후 시설 등의 문제를 개선해 완전 공개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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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하철 1·2호선 신설동역의 '비밀 플랫폼'. |
◆공포영화 단골 '신설동 유령역'
서울 지하철 1·2호선 신설동역에도 숨겨진 플랫폼이 있다. 지난 43년간 방치된 이 플랫폼은 지도에서조차 자취가 감춰졌던 장소였다. 1974년 1호선 신설동역 건설과 함께 지어졌지만 일부 노선이 변경되면서 본래 기능을 상실했다. 그 후 열차가 운행을 종료한 뒤 복귀하는 선로로 쓰이고 있다. 역에 근무하는 직원조차 존재 자체를 잘 모른다고 하니 사실상 거의 활용되지 않는 모양이다.
이 공간의 존재를 알리는데 앞장선 이는 ‘미디어’다. 이곳에서 영화 '감시자들', KBS 2TV 드라마 '스파이', 엑소의 뮤직비디오 등이 촬영됐다. 이를 계기로 누리꾼 사이에서 ‘유령역’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평소 사용되지 않는 공간이다 보니 조명이 어둡고 벽도 낡아 당장에라도 유령이 튀어나올 것 같이 괴괴해 공포 분위기 연출에 안성맞춤이다. 이 곳이 신설동역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있는 녹슨 이정표도 그 분위기를 더한다.
유령역을 활용해 서울시는 지난달부터 영상 전시를 하고 있다. 서울의 역사가 빔 프로젝트를 통해 벽면에 나타난다. 시는 지난달 19일부터 ‘유령역’ 체험자를 선착순으로 받았고 역시 신청자가 몰려 순식간에 마감됐다.
역 자체는 여전히 열차가 지나가고 있는 만큼 안타깝게도 상시 개방은 힘들다고 한다. 내달 26일까지 사전 신청한 인원이 모두 관람을 마치고 나면 다시 문이 닫히고 비밀의 장소로 남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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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마포구 월드컵경기장 맞은편에 위치한 '문화비축기지'의 모습. |
◆문화시설로 다시 태어나고 있는 숨겨진 장소들
지난 9월에는 서울 마포구 월드컵경기장 옆 ‘문화비축기지’가 공개됐다. 이 공간은 본래 41년간 1급 보안시설로 규정돼 일반인의 접근이 통제됐던 비밀 장소였다. 석유 탱크가 설치된 이곳은 기름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한 비축기지의 역할을 해왔다.
지금은 석유 대신 문화를 비축한다는 의미로 새 이름이 붙여졌다. 이곳에 설치된 유류 탱크인 ‘T1’부터 ‘T5’까지 5곳은 문화 전시장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 중 ‘T3’는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기로 했고 ‘T6’란 이름의 원형 전시장도 추가로 지어졌다. 은둔의 장소는 공원 조성과 더불어 이렇게 문화시설로 다시 태어났다.
서울 도봉구의 대전차 방호시설도 문화·창작공간으로 탈바꿈하고 대중에게 공개됐다. 이곳은 6·25전쟁 후 북한군이 남침했던 길목에 자리 잡고 있는데, 유사 시 건물을 폭파해 북한군의 통행을 차단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벙커와 화기 발사용 구멍 등이 방치돼 왔지만 지난해 리모델링 공사를 시작해 예술가와 지역 주민을 위한 ‘평화문화진지’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글·사진=안승진 기자 prod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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