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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주재 북한대사관에 근무하다 2015년 한국으로 망명한 전 북한 외교관 한진명씨. |
한씨는 최근 국가정보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을 퇴직하고 사회로 나왔다. 서너 차례의 일본 미국 등 외국 언론사와의 인터뷰를 제외하면 세계일보 통일지도자아카데미 특강이 사실상 남한에서의 첫 대민 접촉이자 대외 활동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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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 21일자 세계일보 기사. 북한 외교관 한진명씨의 망명 사실을 가장 먼저 보도했다. |
한씨는 이어 몇 가지 충격적인 사실을 함께 털어놓았다.
우선, 베트남주재 북한대사관을 탈출해 베트남주재 한국대사관에 전화해 북한 사람이라고 하자 대사관 직원이 “담당 직원이 퇴근했으니 나중에 다시 전화하라고 했다”고 놀라워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다른 사람 휴대전화를 빌려 어렵게 전화 한 건데 그렇게 전화를 받으니 앞이 캄캄했다”면서 “다른 탈북자나 망명객들을 위해서라도 한국대사관은 24시간 긴장해 있어야 한다”고 당시의 아찔했던 경험을 털어놓았다.
두 번째, 김정남 살해 등 외국대사관에 파견 나가 있는 요원들은 대부분 외무성이 아닌 조선노동당 조직지도부 소속이라고 밝혔다. 따라서 한국 언론이 남한 기준을 적용해 대사관 근무자들을 뭉뚱그려 모두 북한 외무성 소속이라고 하는 것은 오보라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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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명 전 북한 외교관이 6월 7일 세계일보 평화연구소 주최 통일지도자아카데미에서 ‘북한 엘리트와 통일 딜레마’를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한씨는 이날 첫 특강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대외 활동에 나설 계획이다. |
네 번째, 김정일 집권 시기부터 시작된 권력제어정책으로 김일성 시대 때 잘 나가던 항일투사나 그 2세들의 권력 엘리트 진출을 철저히 차단하기 시작하였고, 김정은 집권 이후에는 사실상 최룡해를 제외하고는 항일투사 2세들의 이름이 거의 사라졌고, 항일투사 3세들의 정계 진출은 사실상 전무한 상태라고 주장했다. 독재체제에 저항하거나 권력화 할 수 있는 세력을 조기에 발본색원 했다는 의미다.
다섯 번째, 연좌제의 나라였던 북한이 부자손 권력 세습으로 엘리트그룹의 부침이 심해지니 혼인 방식에 큰 변화가 생겼다는 것이다. 즉 자녀의 혼인상대를 과거처럼 혁명가정보다 계급적 토대는 양호하나 물질적 조건이 열악한 발전성 있는 명문대 대학원생들 속에서 선발해 후원까지 하는 새로운 풍습이 생겼다는 것이다. 따라서 엘리트 남성은 방심하는 사이에 본인의 의사나 연애 감정과는 상관없이 강제 결혼 당하기 일쑤라는 주장이다. 그래야 절대적인 충성심을 유도할 수 있고, 연좌제에 따른 불이익으로부터 꼬리 자리기식으로 직계 가족의 불행을 모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망하는 직업군도 당 간부 등 정치보다 미래성과 통일 이후에도 대우받을 수 있는 경제·기술 분야를 선호한다는 것이다.
여섯 째, 북한 엘리트 지배층 연령의 하향조정이다. 전엔 70대는 돼야 부상(장관)급이 됐었는데 반해 김정은 체제 들어와서는 실력만 검증되면 50대 부상과, 40대 부국장 승진 등 파격적인 인사가 눈에 띄게 진행되고 있다는 주장이다. 한씨는 현재 만 33세인 김정은이 40세가 될 때까지는 자기 측근들을 당·정·군 요직에 앉히기 위한 내적 인사 조치들이 빈번하게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했다. 따라서 나이가 많은 북한 엘리트들이 고뇌와 불만이 극대화될 가능성이 크므로 향후 5년여 기간이 김정은 정권의 향방을 결정하는 중요한 시기라는 것이다.
일곱 째, 한씨는 북한 김정은의 정책 결정에 즉흥적인 게 종종 있어 실책이 이어진다는 증언도 했다. 이를테면 태영호 전 런던주재 영사가 자녀 둘을 모두 데리고 망명할 수 있었던 것도 스위스 유학 경험이 있는 김정은이 “(자식이 인질인 걸 모르고) 왜 자식을 (북조선에) 하나씩 떨구고 다니느냐”고 발언해 동반 출국을 허용하는 바람이 그 틈을 이용해 온가족이 함께 망명했다고 이야기 했다.
여덟 째, 김정은은 2014년 국내외 북한 주민에게 2명 이상 모여서 음주하지 말라고 금주령을 내렸다. 이는 김정은의 집권 과정을 묵묵히 지켜보던 북한 주민과 엘리트들의 불만어린 의사소통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비록 사소한 것이라도 단속에 걸리면 요절이 나기 때문에 북한 사회에는 가정 내 컴퓨터 데스크탑을 없애는 운동이 일어났다고도 밝혔다. 자녀가 무심코 한국 드라마나 미국 영화 등을 본 게 들통 나면 온가족이 정치범수용소 행이나 좌천되기 때문에 미연에 이를 방지하기 위해 아예 화근을 없앤다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의 엘리트들은 지도자에 대해선 무조건 침묵으로 일관한다고 전했다. 말 한 마디 잘못 뻥긋했다가 어떻게 될 지 모르는 공포정치의 소산이다. 한씨 자신도 아내가 엘리트 부인들과 이야기 도중 김정일 가족 이야기를 했다가 보위부원에 감지돼 해외 파견은 물론 패가망신 당할 뻔했다고 고백했다.
아홉 째는 북한 사회에 만연한 부정부패다. 뇌물은 기본이고, 국가재산을 횡령하거나 로비를 받는 것도 응당한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특히 밀무역 등을 통해 외화를 많이 만지는 계층은 해외 출장 등을 통한 자금세탁까지 성행한다고 밝혔다.
열 번째, 통일문제와 관련해 한씨는 북한 사회는 엘리트층과 일반 주민 사이에 미묘한 봉건적 갈등이 존재한다며 이를 잘 활용하면 결코 쉽지 않은 통일의 문이 열릴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북한의 자멸을 기대하기보다는 독재정권 하에서 기득권층의 말 못하는 심중과 고충을 파악하고 그것에 걸맞은 통일전략을 구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결론내렸다. 나아가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 3만여 명 사이의 갈등 관계를 잘 연구·분석하면 해법이 나올 것이라고 숙제를 던지듯 말했다.
조정진 기자 jjj@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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