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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살아도 산이 그립다] (27) 비극을 건너가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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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6-07 09:00:00 수정 : 2017-06-12 14: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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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영경의 마르디 히말 트레킹
안나푸르나, 안녕! 

포카라를 떠난다. 산을 나와 레이크 사이드에서 이틀 밤을 묵었다. 이른 아침 카트만두로 가기 위해 버스터미널로 갔다. 

그런데, 2,500루피로 예매한 버스가 아무래도 수상하다. ‘자가담바’라는 같은 이름을 쓰는 버스가 하나는 2,500루피, 다른 하나는 2,000루피. 앞은 세 줄 좌석, 뒤는 네 줄 좌석이니 앞의 버스가 자리가 더 널찍하고 편한. 그러니까 내가 지불한 금액은 2,500루피인데 정작 버스는 2,000루피용.

“어떻게 된 겁니까?”

“(그 정보를) 어디서 들었어요?”

“사람들로부터도 듣고 인터넷으로도 확인했어요.”

아니, 상황을 설명해주면 되지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느냐를 왜 묻는가.

자기들끼리 한참을 툭닥툭닥하더니 500루피를 돌려준다. 사정을 잘 모르는 여행객을 대상으로 2,000루피 버스를 2,500루피 버스인 양 슬쩍 표를 파는 일이 더러 있는 듯.

일이 왜 그리 되었는지 그들은 설명하지 않았고(못했고?) 사과도 하지 않았다. 나 역시 화를 내지 않았고. 여기는 네팔이니까. 그들은 그들의 방식으로 사는 것일 테니. 때로 정직하고 더러 그렇지 못하기도 한 건 사람 사는 동네 어디나 그럴. 그렇더라도 마냥 지나칠 수 없었던 건 같은 상황에 놓일 다음 여행객을 위해서도! 

<<사진 = 버스에서 본 카트만두>>

카트만두까지 7시간여 걸렸다. 중간에 한 리조트에서 뷔페식 점심을 먹었다, 버스회사에서 제공하는. 네팔은 요걸트가 정말 맛나다. 2014년 11월 네팔행에서 들른 박타푸르에서는, 요걸트가 담긴 구운 그릇이 1회용이더라. 종이컵보다 그게 더 싸다는 네팔.

재밌는 풍경도 하나, 여승무원들이 타고 왔던 버스에서 자기 회사의 다른 버스(왔던 곳으로 가는)로 갈아탔다. 반만 오고 다시 자신이 온 도시로 되돌아가는. 썩 괜찮은 방식! 

카트만두에 다 이르렀다 싶을 때 건너편에 앉았던 나이 많은 아버지와 중년의 서구인이 어깨를 으쓱하며 한 마디 건넸다, 괜찮냐고. 깎아지른 천 길 낭떠러지는 둘째 치고 맞은편 차들과 비껴가는 것이 곡예와 다를 바 없었으니. 게다 줄이지도 않는 속도라니.

“정신없이 자서 다행이네요.”

막바지에야 눈을 떴던 터.

“타멜로 가는 건가요?”

같이 버스에서 내린 젊은 여자에게 물었다. 캐나다에서 온 그니와 다른 한 사람과 n분의 1로 택시를 쉐어했다. 여행지에선 여행객들끼리 고마워할 일이 많다. 같은 처지이니까.

늦지 않은 하오였다. 비행기는 이튿날 밤 11시이니 거의 이틀이 남은 셈. 게스트하우스에서 쉬다가 타멜 거리를 어슬렁거리다가 여행객을 만나 수다를 떨다가 기념품 가게를 기웃거리다가 그리운 이에게 엽서도 한 장.

<2017년 3월 9일, 네팔행 15일차: 카트만두>

2015년 4월 파리에 있었다. 버스 안에서 곁에 섰던 프랑스 젊은 할머니가 말을 붙였다.

“소식 들었어요? 네팔에 큰 지진이 났대.”

그들은 대개 국제사회의 여러 가지 이슈며를 화제로 꺼낸다. 파리의 그런 문화가 좋다. 지나간 늦가을에 다녀왔다고 하자 그때 다녀오길 잘했다 다행하다 같이 안도해주었다. 호텔로 돌아와 TV를 켜자 온통 지진 소식이었더랬다. 

그해 4월 25일 네팔은 1934년 이후 가장 강한 지진을 만난다. 이 지진으로 네팔, 중국,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들에서 8천400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카트만두 계곡의 카트만두 더르바르 광장을 비롯 파괴된 유네스코 세계유산 만도 여럿. 지진이 일어날 당시 부상자 61명에 실종자 '수십여 명'을 포함해 700명에서 1,000명 이상이 에베레스트 산에 있었다고. 완전히 파괴된 가옥 수만도 14만 채를 넘었고 네팔 내 학교 5,000여 곳도 무너졌다 했다. 지진 직후 카트만두 트리부반 국제공항은 일시적으로 폐쇄되었다가 26일 다시 열렸다.  



<<사진 = 타멜 거리는 바자르(시장)로 이어지고 바자르는 카트만두 더르바르 광장으로 연결된다. 관광객들에게는 입장료를 받지만 현지 사람들은 세계 문화유산 유네스코 지정 건물과 건물 사이에서 장을 보러 가고, 장사를 하고, 출근을 한다. 네팔에서는 그렇게 생활에 유물이 살아있다.>>
<<사진 = 카트만두 한 게스트하우스의 옥상>>
이른 아침 타멜거리에서 바로 이어진 바자르를 걸었다. 길은 카트만두 더르바르광장으로 이어졌다. 내친 김에 택시로 파탄 더르바르광장까지.

2015년 지진의 흔적은 아직도 건물 사이 사람 사이에 남아있었고, 사람들은 여전히 삶을 쌓고 있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한 장면처럼. 비극을 그렇게 건너가고 있었다. 

삶의 처연한 시간들도 잘 지나는 법이 그런 것 아닐지. 그냥 ‘지나가기’. 비켜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관통하여. 아픈 사랑도 분노도 그것을 잘 지나는 법은 한 가운데로 걸어가는 것, 더위를 피하는 법 역시 더위 속으로 걸어가 버리는 거라는 농담처럼. 분명한 건 어디로든 ‘흘러간다’는 것. 모든 일은 일어났다 사라진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별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많이 머물 계획이 아니라고 하자 택시 아저씨가 입장료를 지불하지 않는 길들을 안내했고, 대신 그만큼 전을 펴놓은 길가에서 먹을 것을 샀고(사주었고?), 아저씨에게 돈을 더 지불하기도 했다. 

타멜로 돌아와 전통악기며 물건 몇 가지 흥정을 했고, 적절한 수준의 가격을 고려했다, 책임여행이란 그런 것일 터. 가장 값싼 가격으로 샀다는 게 꼭 자랑만은 아닐. 

서점에 다시 들렀다. 아이들에게 다례를 가르치고도 있는데, 차를 많이 마시니 아무래도 좋은 차에 탐심이. 그런데 품질 좋은 홍차와 백차 가격이 1kg에 13,000루피까지 한다. 네팔물가로서는, 그것도 가난한 여행자로서는 엄두를 내기 어렵다. 이 집 저 집 눈만 즐겁다가 늘 좋은 차를 나눠주시는 한 어르신께 드릴 선물로 아쉬운 대로 대중적인 가벼운 홍차라도 좀 사기로 한 것. 

그런데, 아, 저것!

여기까지 지독하게 내 허리를 감고 왔던, 아니 사실은 내가 그의 손을 붙잡고 왔을, 이제는 곁에 없으나 결국은 곁에 ‘있는’(내가 보내지 않는 한) 그를 반추하며 포스터 한 장 샀다. 산을 사랑하고 책을 좋아하고, 그리고 내 삶에 환희였던 사람.

에베레스트 최초 등정 60주기 기념 포스터였다. 뉴질랜드의 에드먼드 힐러리와 네팔 세르파 텐징 노르가이. 정상 아래에 30여 분 먼저 도착해 힐러리를 기다린 텐진 노르가이였지만 두 사람 중 정녕 누가 먼저 올랐냐 집요하게 묻는 기자들에게 끝까지 ‘함께’라고 대답했던 둘.  

마지막 밤, 공항으로 가는 택시비를 빼고 얼마큼의 돈을 저녁 식사비로 남겼다.

어디를 가면 좋을까, 타멜을 좀 걸었고, 무얼 먹을까 잠시 생각할 때 앞에서 누군가 다가왔다... 
(계속)

옥영경(자유학교 물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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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서 본 카트만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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