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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약집에도 없는 약자들] 기초연금 받았다 뺏기는 노인들

입력 : 2017-05-17 21:11:21 수정 : 2017-05-17 21: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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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연금 ‘소득’으로 계산… ‘쥐꼬리’ 기초생계비서 깎여 / 굶지 않을 정도의 최저 생활비 지급 / 교통비 등 부담… 동네 밖 활동은 포기 / 노숙자 겨우 면했지만 삶 의지 상실 / 1월 기준 42만명… 전체 수급자의 9% / 새 정부 복지 공약에서도 ‘사각지대’ / “가난한 노인도 사람답게 살게 해야”
정오의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는 도시의 건물에서 정장 차림의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서울역 앞 용산구 동자동 일대의 풍경이 변하는 순간이다.

동자동 골목에서 담배를 피우던 노인들은 거리의 소란스러움을 피해 언덕 중턱의 작은 공원에 모여든다. 노인들이 물러난 자리에는 점심을 먹으러 나온 직장인들이 들어찬다. 바닷물이 밀려난 뒤의 갯벌을 기다리는 어부처럼 후방에 모였던 노인들은 직장인들이 일터로 돌아간 뒤에야 큰 길가로 다시 내려온다.

서울역 쪽방촌 주민들의 자치조직인 ‘동자동 사랑방’ 관계자는 “똑같은 건물과 거리이지만 시간대별로 이곳을 채우는 사람들이 달라지며 동네 인상이 변한다”고 말했다.

약 10년 전 이곳에 거처를 마련한 김호태(71)씨도 이같이 움직이는 노인 중 한 명이다. 서울역을 등지고 서면 위용을 뽐내는 서울스퀘어 건물과 세브란스빌딩, 서울시티타워가 보인다. 김씨의 보금자리인 쪽방촌은 이들 건물 뒤쪽에 자리하고 있다. 서울시티타워에서 후암로 방향으로 한 블록만 걸어가면 고립된 노인들의 섬이 펼쳐진다. 각각 2평 미만의 쪽방에서 1000명이 넘는 노인들이 누에고치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

김씨는 “서울역 앞 동자동과 후암동에 약 1200가구가 산다”며 “노숙 직전의 노인들”이라고 소개했다. 그를 포함한 대부분은 정부지원금으로 이곳에나마 거처를 얻은 기초생활수급자다. 국가의 도움이 없었다면 길거리에 나앉았을 것이다. 

김씨가 정부로부터 매월 받는 돈은 기초생계비 49만원과 주거비 20만원이다. 65세 이상 노인 소득하위 70%에게 주는 기초연금은 받지 못한다. 매달 25일 기초연금이 들어왔다가 다음달 20일 기초생계비에서 깎인다. ‘줬다 뺏는 연금’인 셈이다. 그는 지난 2월까지 정부로부터 받는 돈이 부족하지 않았다. 과거에 공사장에서 일용직으로 일하며 대퇴부 수술을 받고 무릎 부상을 입었지만 김씨의 건강상태는 양호한 편이었다. 술, 담배도 거의 하지 않았다. 아껴 쓰며 조금이나마 저축도 했다. 그러나 3월부터 ‘동자동 사랑방’ 대표를 맡으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좀체 자기 목소리를 내지 않는 이곳 주민들과 달리 그는 기초생활수급 노인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동네 밖에서도 활동했다.

생활반경이 넓어지고 교통비, 식비 등이 늘면서 기초생계비만으로는 감당이 안 됐다. 결국 매달 조금씩 모았던 돈을 까먹게 됐다. 기초생계비는 일종의 ‘꼼짝마 지원금’이었다. 그 수준으로는 현재 사는 곳에서 최소한으로 입고 먹고 자는 것 이외의 활동이 어려웠다.

나라마다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최소 생활수준에 대한 눈높이가 다를 텐데 우리나라는 굶지 않고 길바닥에서 잠들지 않을 정도에 맞춰져 있었다. 근로소득이 생기면 그만큼 기초생계비에서 깎기 때문에 정부에서 정한 최소한의 생활을 벗어나기도 어려웠다. 기초연금도 ‘소득’으로 계산해 줬다가 도로 가져갔다. 이렇게 기초연금을 받지 못한 노인은 1월 현재 42만1000명으로 전체 수급자(465만4819명)의 약 9%다.

김씨는 “기초연금을 받는 노인 중 상위그룹에게 20만원은 몇 끼 식사값밖에 안 되는 돈이겠지만 우리에게는 생활을 윤택하게 해주는 금액”이라며 “새 대통령도 노인복지 수준을 높이기 위해 기초연금을 올려주겠다면서 여전히 우리를 쏙 빼놓았다”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65세 이상 노인 소득하위 70%에게 현행 20만원인 기초연금을 30만원으로 인상하겠다고 공약했다. 국민연금과 연계해 일부에게 적은 돈을 주는 감액제도도 폐지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기초생활수급 노인의 처우 문제는 주목하지 않았다. 더불어민주당은 지난해 총선 때 기초생활수급 노인에게 기초연금을 주겠다고 공약했으나 선거용에 그쳤다.

김씨는 쪽방촌 노인들을 “삶의 의지를 잃어버린 사람들”이라고 했다. 몇 걸음 움직일 수도 없는 쪽방에서 잘 나오려 하지 않고 아파도 병원에 가지 않는다고 한다. 스스로를 방에 가두고 살다 고독사하는 노인도 수두룩하다. 김씨만 해도 오랜 기간 건축현장에서 일했지만 60세 이후로는 일자리를 구하기가 어려워졌다. 다친 몸을 이끌고 먹고살기 위해 애를 먹었다. 그러다 66세 때 자립의지를 포기하고 기초생활보장제도의 품에 들어갔다. 그는 “기초연금은 가난한 노인을 사람답게 살게 하는 제도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변의 많은 노인이 기초생계비만으로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다. 술과 담배 때문인 경우가 많았다. 절망에 익숙해지면 술과 담배와 가까워지는 법이다. 쪽방촌 노인의 일부는 주거비를 제외하고 남은 49만원의 절반 이상을 담뱃값으로 지출했다. 2년 전 담뱃값이 올라 전체 생활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훨씬 커졌다. 대신 제대로 먹고 입는 걸 포기했다.

김씨는 이에 대해 “술과 담배로 세월을 보내는 사람에게 돈을 더 주면 술을 더 먹을 수 있지만 그중에는 생활이 나아져 삶의 의욕을 갖는 사람도 분명히 생긴다”며 “기초연금은 삶의 악순환에 빠진 사람의 나쁜 고리를 끊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65세 노인의 70%에게까지 주면서 기초생활수급 노인에게 기초연금을 주지 않는 이유를 모르겠다”며 “배부르게 사는 사람들은 우리 같은 사람이 생각하는 10만원, 20만원의 의미를 모르는 것”이라고 토로했다.

◆도움 필요 빈곤선 이하 지급… 수급률 정한 곳 한국·칠레뿐

“기초연금제도를 도입한 나라 중에 우리처럼 65세 이상 노인의 70%에게 주겠다며 수급 비율을 정해놓고 운영하는 나라는 거의 없다.”

2014년 도입된 기초연금제도의 모태는 참여정부가 시행한 기초노령연금제도다. 65세 이상 노인의 60%에게 10만원을 주다가 정권이 바뀌면서 70%에게 20만원을 지급하는 형태로 개편됐다.

하지만 호주, 뉴질랜드, 영국, 일본, 캐나다 등 기초연금제도를 운영하는 나라 가운데 우리나라처럼 목표수급률을 정해 놓은 곳은 칠레밖에 없다. 연금 역사가 오래된 선진국들은 나이, 거주기간 등을 충족하는 모든 노인에게 지급하거나 국가에서 설정한 빈곤선 이하 노인에게만 연금을 지급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한국처럼 70%라는 일정 비율을 정해 놓고 지급하지 않는다. 이 같은 비율은 정치적 결정에 따른 것으로, 도움이 필요한 기준선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기초연금 시행 이후 수급률은 3년 연속 목표치인 70%를 밑돌았다. 지난해 기초연금을 받은 65세 이상 노인은 전체 698만7000명의 65.6%인 458만1000명에 그쳤다. 2014년과 2015년 수급률도 각각 66.8%, 66.4%였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 65세 이상 노인 소득하위 70%에게 기초연금을 30만원으로 올려주겠다고 공약했다. 국민연금과 연계해 일부에게 적은 돈을 주는 감액제도도 폐지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공적연금제도를 여러 개 운영하는 유럽에서는 각각을 연계해 전체 지급액이 평균임금의 40∼45%가 되도록 조정하고 있다. 세계은행(WB)과 국제노동기구(ILO)에서는 공적연금의 소득대체율을 각각 40%, 45%로 권고하며 이보다 높은 수준은 지속가능하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유럽보다 수급자 비율이 낮고 연금의 보장수준도 떨어지는 우리나라는 현재 수준에서 보면 연계 제도를 폐지해 소득대체율을 높일 필요가 있지만 장기적으로 2개의 공적연금을 운영하려면 연계제도를 통해 전체 연금액 수준을 조정해야 한다. 전문가들은 “국민연금 제도를 현행 방식으로 유지할 거라면 65세 이상 노인의 70%에게 주기보다는 빈곤선 이하의 노인에게 더 지원해 주는 게 제도 취지에 부합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현미 기자 engin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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