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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동·서양 문화 공존… 화려함과 소박함을 지닌 묘한 도시

입력 : 2017-04-01 09:00:00 수정 : 2017-03-31 20:5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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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홍콩

# 영웅의 두 가지 본색

오래전 서소문에 있는 호암아트홀에 친구와 함께 영화를 보러 간 적이 있다. 당시 거기서 ‘모던 타임즈’가 상영되고 있어서, 찰리 채플린이라는 20세기 최고의 코미디언과 현대 사회에 대한 신랄한 풍자가 깃든 수작을 ‘아트홀’에서 감상하는 나름 고상한 문화생활을 누리는 저녁이 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날은 일요일이었고, 저녁까지 표는 매진이었다. 요즘처럼 인터넷 예매 같은 개념이 아예 없을 때라 마냥 줄 서서 기다려 표를 사던 시절이고, 그나마 다 팔렸다니 그냥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거기서 길 하나 건너면 극장이 하나 더 있었다. 나온 김에 원래 보려던 영화와 온도 차이가 많이 나긴 하지만 저거라도 볼까, 하고 들어갔던 것이 ‘영웅본색 Ⅱ’였다. ‘영웅본색 Ⅰ’을 안 봤더라도 줄거리 이해가 어렵지 않은 영화였다. 전편에서 죽은 주윤발이 쌍둥이동생이라는 설정으로 부활하여(얼굴에 점 하나 찍고 부활하는 막장 드라마의 원조 격이 아닐까) 화려한 쌍권총 액션을 뽐내며 복수극을 펼친다. 거기에 우울한 눈을 한 귀공자 장국영이 공중전화 부스에서 죽어가는 모습이 겹쳐지면서 이른바 홍콩 누아르 특유의 비장미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주윤발과 장국영이 강호를 주유하던 몇 년 동안 우리나라에 개봉된 홍콩영화가 수십 편일 텐데, 대부분 주류 개봉관이 아닌 변두리 극장에서 상영되었다. 그들이 한 장면이라도 나오는 영화면 무조건 들여와 대문짝만 하게 간판에 넣어 홍콩영화 마니아들을 유혹하곤 했다.

개중에는 웬만한 영화는 다 보러 가던 관대한 관객들이 외면했던 영화도 있다. 중앙극장에서 왕가위 감독의 ‘아비정전’이 개봉됐는데, 그의 이전 작품인 유덕화, 장만옥 주연의 누아르풍 로맨스 영화 ‘열혈남아’를 떠올리며 보러 갔던 사람들이 기대 이하에 지루하기만 하다고 소문을 내버렸다. 그간 수많은 홍콩영화에서 활약 중이던 유덕화, 양조위, 장만옥 같은 배우들이 영화 속에서 무더운 일상에 지친 평범한 젊은이들로 분하여 오가는 사이, 속옷 차림으로 맘보를 추던 장국영의 유난히 무심한 눈길과 몸짓은 본 사람이라면 절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주윤발과 장국영은 마치 양지와 음지처럼 홍콩이라는 장소와 시대의 양면성을 과장된 액션으로 담아내며 당시 한국의 젊은 영화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사실 홍콩 누아르의 전성기를 이끈 두 배우의 인생은 무척 대조적이다. 가난한 집안 출신의 주윤발은 집배원·외판원·웨이터 등 각종 직업을 전전하다 배우가 되어 연기력을 인정받고 ‘영웅본색’ ‘첩혈쌍웅’ 등에서 선량한 웃는 얼굴과 화려한 액션을 선보이며 아시아권 스타로 떠올랐다.

장국영은 부유한 직물상의 열 번째 자식이었지만 가정불화 속에서 십대 때 영국 유학을 갔다가 졸업을 못한 채 돌아와 가수로 먼저 데뷔했다. ‘영웅본색’ 외에 ‘천녀유혼’ ‘아비정전’ ‘동사서독’ ‘패왕별희’ 등에서 다른 배우가 대체할 수 없는 특유의 아우라를 내보이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웃고 있어도 우는 듯한, 앞모습도 뒷모습 같은 그의 묘한 분위기를 사랑했던 많은 팬을 뒤로하고 2003년 4월 1일 홍콩의 한 호텔에서 투신해 생을 마감했다. 


영국 건축가 노먼 포스터가 설계한 홍콩상하이은행 본사. 건물 외부에 구조와 설비를 노출시켜 내부 공간을 건드리지 않고도 지속적인 보수와 관리가 가능토록 한다는 이른바 ‘하이테크 건축’ 개념을 도입한 것이다.
# 홍콩, 희망과 불안이 공존하는 무적(無籍)의 도시

대한민국 국민이 해외를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게 된 것은 88올림픽을 치르고 난 1989년부터였다. 물론 여행의 자유가 있어도 경제적인 여유가 없다면 그것이 가능하지 않았겠지만, 민주주의 국가임을 표방하는 나라에서 여행에 제한을 두었던 것은 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긴 여행이나 개인의 자유에 대한 제한이 많은 북한 역시 민주주의공화국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것을 보면,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상당히 자의적이며 상대적인 용어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여러 가지 조건들이 딱 들어맞았던 80년대 말, 때맞춰 시행된 여행자유화 정책으로 우리도 세계 방방곡곡 소문으로만 들었고 이야기로만 들었던 곳을 여행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됐다. 나는 그로부터 한참 지난 90년대 중반이 돼서야 해외여행을 하게 됐다.

그때 처음 밟은 외국 영토가 바로 홍콩이다. 사실은 관광차 나선 여행이 아니라 업무적인 출장이었다. 홍콩이라는 곳은 비행기가 뜨자마자 바로 내리는 정도는 아니라도, 서울에서 몇 시간 가지 않아 도착하는 가까운 도시였다. 게다가 여러 가지 다양한 간접경험으로 이미 몇 번은 다녀온 듯한, 혹은 몇 년은 체류한 듯 친숙한 곳이었기 때문에 큰 이질감이나 이국적인 풍광이 주는 흥분은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그건 아무래도 홍콩영화 때문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나의 경우는 외팔이 시리즈로 유명한 홍콩의 배우 왕유로 시작해서 이소룡과 성룡을 거치며 주로 유쾌하고 호들갑스러운 무술 영화를 섭렵했다. 외팔이 시리즈는 시대극이라 그 배경이 홍콩이 아니었지만 이소룡의 영화를 거쳐 이어지는 영화들은 홍콩의 거리나 뒷골목의 풍경이 자주 나왔고, 그들의 비슷한 듯 우리와는 사뭇 다른 생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내가 출장을 갔던 때는 하필 한여름이었고 아열대 기후대인 홍콩은 무척 덥고 습했다. 더군다나 매일 먹는 느끼한 음식과 물을 갈아서 그랬는지 지독한 복통을 수반한 배탈로 허덕거리며 며칠을 보냈다. 출장의 목적은 홍콩에 있는 초고층 건물을 조사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홍콩 섬과 주룽 반도에 신기루처럼 펼쳐져 있는 높은 건물 숲을 헤매고 다녔다. 깨끗하고 단정한 도심의 한가운데를 며칠 동안 돌아다니는 일정을 다 마치고, 우연히 백화점에서 만난 연변에서 온 점원이 준 환약을 먹고 배탈을 겨우 떨쳤다.

내가 갔던 때는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되기 직전의 시점이었다. 또한 그때는 20세기가 저물어가며, 온 세상이 세기말에 대한 공포와 기대가 반씩 섞인 채 휘청거리고 있던 때였다. 특히 자본주의의 최첨단에서 몇십 년을 보낸 홍콩인들 입장에서 겪는 사회주의 국가의 체제 안으로 들어갈 때의 불안과 공포는 상당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콩 영화는 비장하면서도 무척 웃긴다. 언제 그렇게 심각했느냐는 듯 맥락 없는 웃음을 끌어내는 그 가벼움을 낯설어 하는 이들도 많다. ‘가유희사’류의, 혹은 주성치 주연의 유머가 넘치는 ‘소림축구’ ‘쿵푸허슬’ 같은 영화들이나, 70년대에 양산되었던 코믹 무술영화들은 80년대 이후 중국 반환이 임박하면서 유행했던 누아르와는 상반된 지점에 있다.

그런데 그 차이는 그야말로 아무런 경계가 없다. 왕가위 감독이 진지하고 우울한 시대극 ‘동사서독’을 너무 오랫동안 구상하면서 완성이 한없이 미뤄지자, 그 출연배우들(무려 장국영, 임청하, 왕조현, 양가휘, 양조위, 장만옥, 장학우, 유가령 등등)이 코믹 영화인 ‘동성서취’를 찍어 선보인 건 웃음과 눈물이, 희망과 불안이 한 몸처럼 공존하는 홍콩에서 일상을 보내는 홍콩배우들에겐 그다지 특별한 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반환을 앞둔 홍콩인의 불안과 고민을 읽을 수 있었던 영화 ‘중경삼림’의 배경이 되는 중경빌딩.
# 도시에 새겨진 생생한 문신 같은 홍콩 상하이 은행

홍콩은 양면성을 가진 묘한 도시이다. 중국과 영국이 겹쳐져 있는 역사적인 배경 속에서 독특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며, 인구는 과밀하고 1인당 국민소득이 3만달러를 넘어선 부자도시이기도 하다. 몇 군데를 둘러보고 홍콩을 알았다고 하기는 힘들다. 극도로 상업화되고 자본주의가 발달한 도시적 면모와, 그 이면에 있는 낙후되고 디스토피아적인 슬럼지역 등이 공존하는 모습은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미래에 대한 성찰을 담은 여러 공상영화의 배경으로 등장하곤 했다. ‘블레이드 러너’가 그랬고 ‘공각기동대’가 그랬다. 
구룡채성.

두 영화에 모두 등장하는 배경이 되는 곳이 구룡채성(九龍寨城)인데, 내가 홍콩에 갔을 때는 이미 해체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원래 송나라 때 만들어진 일종의 요새인데 영국과 중국 양쪽 모두의 주권이 미치지 못하는 중립적인 지역이 되면서 난민들이 몰려들었다. 원래 2층이던 건물을 15층까지 쌓아올리며 1㎢당 170만명이라는 인류역사상 최대의 인구밀도를 기록했다는 그 무허가 건축물은 1993년에 철거되고 그 자리는 공원이 됐다.

그 무렵 크게 히트한 영화가 왕가위의 ‘중경삼림’이다. 633(금성무)이나 233(양조위) 등의 번호로 지칭되는 남자주인공의 모호한 정체성이나 동양인의 얼굴을 금발과 검은 선글라스로 가리고 스크린을 휘젓는 여자 주인공(임청하)의 모습에서 반환을 앞둔 홍콩인의 불안과 고민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영화의 배경이 되는 중경빌딩(重慶大厦:Chungking Mansions)의 복잡하면서도 거대한 이미지는 무척 인상적이었다. 내가 홍콩에서 보고 싶었던 모습은 바로 그런 공간들과 그런 건축이었다. 그건 단지 호기심만이 아니라, 시대에 대한 불안과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가지고 사는 현대인의 한 사람으로서 이를테면 성지 순례하듯 들르고 싶었던 것이다.

홍콩 방문 본래의 목적을 위해 찾아갔던 홍콩상하이은행(HSBC) 본사는 영국 여왕으로부터 ‘경’의 칭호를 받기도 한 건축가 노먼 포스터가 설계한 건물이다. 구조미가 돋보이는 이 건물은 건물 외부에 구조와 설비를 노출시켜 내부 공간을 건드리지 않고도 지속적인 보수와 관리가 가능토록 한다는 이른바 ‘하이테크 건축’ 개념을 도입한 것이다. 파리의 퐁피두 센터(리처드 로저스+렌조 피아노 설계)도 유사한 아이디어로 지어져 많은 논란과 관심을 불러일으킨 바 있는데, 어쨌든 건축이 당대의 기술과 결합했을 때의 모습을 직관적인 형상으로 드러낸다는 면에서 무척 강렬한 스타일이라 할 수 있다.

이 건물은 홍콩의 자본으로 지어졌지만 현장에서의 공정을 최소화하기 위해 대부분의 부재들이 영국에서 수입돼 조립되는 형식으로 세워졌다. 지어질 당시 들었던 엄청난 건설비용으로 인해 세계에서 가장 비싼 건물로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홍콩 상하이은행은 1985년에 완공되었으니 지어진 지 30년이 넘었으나 아직도 시대를 초월한 건축미를 자랑한다. 마치 영원히 늙지 않는 절대자 같은 자태로 당당히 서 있다. 그러나 그 건물은 홍콩의 건축이 아니다. 마치 영국이 홍콩의 몸 위에 새겨놓은 생생한 문신과 같다.

건축이 시대를 증언한다지만 간혹 건축이 아픔을 감추기도 한다. 비슷한 시기에 홍콩의 역사를 담은, 그리고 홍콩에 정착하고 싶어하던 사람들이 쌓아놓은 구룡채성은 사라졌다. 그리고 정체성에 대한 혼돈은 마치 잦아들지 않는 물결처럼 물러갔다가도 다시 찾아오고, 때로는 생을 마감할 정도의 슬픔으로 새겨질 때도 있다.

4월 1일, 오늘은 바로 장국영의 기일이기도 하다.

부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 가온건축 공동대표·‘내가 살고 싶은 작은 집’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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