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후난성 창사시 후난농업대학에 있는 독립운동가이자 중국의 저명한 농학자인 유자명(작은 사진) 선생의 전시실. 독립기념관 제공 |
이후 박찬익의 부탁으로 손문학설의 번역작업을 맡았던 것을 인연으로 선생은 중국 고위관리와 교류했다. 중앙통신사를 경영하는 위안사오셴의 부탁을 받고 1929년 신해혁명의 희생자를 기념하는 농장에서 농업 생산지도를 했다. 그는 이를 계기로 농학자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1934년 칭룽산 농장에서 학생들과 농사를 지었고, 난징건설위원회 둥류농장에서 원예를 가르쳤다. 선생의 활동은 1930년 후반이 되면서 주로 중국 내 한인혁명세력의 통합에 집중되었다. 당시 난징에서는 김원봉의 조선혁명당, 김성숙의 조선민족해방동맹, 최창익의 조선청년전위동맹 등이 통합하여 1937년 조선민족전선연맹이 결성되었다. 이 단체에 선생이 가담한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도 참여했다. 해방 후 선생은 귀국을 결심하였으나, 6·25전쟁으로 조국에 돌아오지 못하였다. 귀국이 미뤄지면서 그는 창사로 거처를 옮겼고, 후난대학에서 교수생활을 하면서 농학자의 길을 걸었다. 만년에 이 대학의 원예학과 명예주임으로 중국 원예학회 명예이사장에 추대됐다. 2013년 선생의 제자들은 성금을 모금하여 후난농업대학 근무 당시 거주했던 집에 전시실을 만들고 인근에 동상을 세웠다.
류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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