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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리포트] ‘피루스의 승리’에 담긴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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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3-13 00:02:58 수정 : 2017-04-11 16: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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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절반 버린 트럼프 국정 운영
‘승자의 저주 시작됐다’ 평가 나와
한국 대통령도 모두 이 덫에 빠져
포용력 큰 차기 지도자 당선돼야
기원전 280년 옛 그리스에 에피루스(Epirus)라는 나라가 있었다. 이 나라의 왕 피루스(Pyrrhus)는 로마를 상대로 연전연승했다. 그러나 그가 거둔 승리의 대가는 너무나 컸다. 싸울 때마다 줄잡아 출전한 병력의 3분의 1가량을 잃었다. 피루스는 그의 참모들에게 고백했다. 이런 승리를 계속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깊은 회한을 토로했다. 그는 또 한 번 승리를 더 하면 에피루스 국가는 그 승리로 인해 영원히 멸망할 것이라고 말했다. 피루스의 승리(Phyrrhic victory)는 이렇게 해서 생겨난 말이다. 막대한 희생을 치른 승리의 사례는 옛 그리스에서부터 현시대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책장에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다.

세계 각국에서 죽기 살기 식 혈전을 벌인 선거가 끝난 뒤에 흔히 패자는 ‘피루스의 승리’라는 말로 쓰린 가슴을 달랜다. 지난해 말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이단아’ 도널드 트럼프가 공화당 예비 경선에서 최종 승자로 등극하자 패자 진영에서 즉각 피루스의 승리라는 주장이 나왔다. 트럼프가 백악관을 다시 민주당에 내주는 에피루스 왕과 같은 존재가 될 것이라고 깎아내렸다. 처음에는 그 말이 미국 보수 성향 유권자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기도 했다. 트럼프가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와 맞붙은 본선에서 시종 고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침묵하던 트럼프 지지자인 ‘샤이 트럼프’가 지난해 11월8일 투표장으로 몰려나갔고, 트럼프는 보란 듯이 힐러리를 꺾었다.


국기연 워싱턴 특파원
트럼프는 대통령에 취임한 뒤 충동적이고 즉흥적인 국정 운영 스타일로 미국을 혼란에 빠뜨렸다. 인사 실패와 권력 암투 및 정책 실패 사례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다. 이제 야당인 민주당 인사들은 트럼프가 피루스의 승리를 거뒀다며 화장실에서 웃고 있다. 특히 트럼프가 선보인 정치와 정책으로 그의 지지층이 최대 피해자가 됐다는 게 민주당 측 주장이다. 트럼프의 핵심 지지층은 저학력, 저숙련 백인 남성이다. 지난 선거에서 고졸과 그 이하 학력 소지자 백인의 67%가 트럼프에 한 표를 던졌다. 트럼프가 전국민 건강보험제도인 ‘오바마케어’를 폐지하면 바로 이들 백인 저소득층이 건강보험을 잃게 된다. 보호무역과 이민장벽으로 물가가 오르고 서비스료 부담이 커지면 중산층 이하 계층이 가장 큰 타격을 입는다. 이 때문에 미국에서 ‘승자의 저주’가 시작됐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헌법재판소가 박근혜 대통령 파면 결정을 내렸다. 승자는 한국 국민이다. 패자는 친박 패거리 정치인과 박사모 회원 등이다. 이 승리의 최대 수혜자 집단은 더불어민주당이다. 문재인 전 대표는 일찌감치 청와대 문턱까지 달려가 있다. 문 전 대표 캠프에 전리품을 노리는 각계 전문가들이 쇄도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야권과 진보 진영에 ‘승자의 저주’를 경계해야 한다는 경보음이 발령됐다. 한국 현대사에서 승자의 저주에 빠지지 않은 대통령이 아직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기 한국 대통령이 이 덫에서 벗어날 것으로 기대할 근거는 전혀 없다. 이 저주의 비수가 더욱 날카롭게 차기 대통령을 향해 날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박근혜 탄핵 사태를 겪으면서 한국 사회는 갈기갈기 찢겨졌다. 차기 대통령이 이런 한국을 잘 추스를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이 과욕일 수 있다.

한국의 차기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중대한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미국 사회가 두 동강이 났고, 여야가 극한 대결을 일삼는 상황에서 트럼프는 미국의 절반을 버렸다. 그는 2020년 재선을 노리면서 오로지 자신의 지지층만을 겨냥하는 정치와 정책에 매달리고 있다. 이른바 불확실한 산토끼를 잡기보다 집토끼를 지키는 게 정치공학적으로 유리하다는 것이 트럼프 진영의 판단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지만 한국의 차기 대통령은 단임이다. 그러니 트럼프와는 다른 정치적 선택을 할 수가 있다. 두 쪽이 난 한국의 반쪽이 아니라 한국 전체를 선택해야 ‘피루스의 승리’에 따른 ‘승자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다. 과연 그런 지도자가 나올까? 탄핵 이후 한국 사회가 떠안은 커다란 물음표이다.

국기연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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