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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 자와 남은 자, 상실과 관계사이 그 ‘틈’에 남은 나는…

입력 : 2017-03-09 21:26:58 수정 : 2017-03-09 21:2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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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재 연작소설집 ‘어디에도 어디서도’
새벽 세 시쯤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처음에는 분명 집을 잘못 찾은 것으로 알았는데 문을 열어보니 회색 정장에 검은 실크 넥타이를 맨 ‘염소’가 낡고 무거워 보이는 가방을 들고 있었다. 그의 방문 목적은 학습지 회사 사외보에 넘겼던 풍경 사진 한 장 때문이었다. 눈 덮인 들판에 얼룩 같은 것이 군데군데 보이는 것이 문제였다. “많은 사람이 간과하고 있지만 …이 세계는 특정 의도와 조작으로 나름의 질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이제 솔직한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제가 선생님을 찾아온 이유는 그 때문입니다. …다른 어떤 것도 상상할 수 없게 만들면 간단히 해결될 일입니다. 눈은 더 눈답게, 숲은 더 숲답게 만드는 거죠.”

김선재(46·사진) 연작소설집 ‘어디에도 어디서도’(문학실험실)의 첫머리에 배치된 짧은 소설 ‘틈’에 대해 말하는 중이다. 이 단편은 상상력의 중요성을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따지고 보면 너무 자명하게 이해되는, 명확하게 제시되는 것만큼 불온한 것도 없다. 누군가의 분명한 의지가 개입된 선명한 흔적이 묻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소설 속 화자를 방문한 존재가 과연 염소였는지, 또 다른 무엇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자신의 시각으로 뒤집어보고 흔들어보는 노력이 더 중요할 따름이다. 이어지는 단편 ‘외박’을 읽기 위해서도 이러한 태도는 긴요하다.

장마가 한창인 여름 새벽 야간작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 보니 임신한 아내가 무너진 흙더미에 깔려 묻혀 있다. 사흘 만에 주검으로 발굴된 아내와 태아를 접하고 남자는 절망의 밑바닥에서 어린시절 자신을 버리고 떠난 엄마를 찾아간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의 외박 허가를 요양원에서 받아내 남자와 노모는 추억을 더듬는다. 남자와 죽어가는 노모 ‘사이’에 ‘나’가 있다. “언제나 나는 사이의 세계에 있다. 당신들이 누운 간격 사이. 혹은 당신들이 서로를 알아볼 수 없는 어둠과 그 어둠의 뒤편 사이. 오래된 과거와 길지 않은 미래 사이.”

이러한 ‘나’는 실체가 분명하지 않은, 시인이기도 한 김선재의 독특한 상상력이 빚어낸 존재다. “나는 바람이 되어 먼지보다 가벼운 질량으로 존재하기도 했고 아무 곳에서나 날아온 나무의 홀씨처럼 오래 한 자리를 지키기도 했으므로 그 기적 같은 일을 눈치 채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당신도 나를 느끼지만 보지는 못한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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