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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를 그린 영화… 삶·작품 너머의 시대와 문화 담다

입력 : 2017-03-03 19:50:54 수정 : 2017-03-03 19:5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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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일반적으로 ‘보는 것’에 속한다. 영화를 ‘듣는다’거나 ‘읽는다’고 하는 경우는 없다. 이는 영화가 ‘모션픽처’(motion-picture), 움직이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잘 만든 영화는 책장이나 화면이 아닌, 사람의 마음속에 남는다. 신간 ‘시네마 인문학’의 저자 정장진 문화사가는 그림처럼 볼 수 있는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말한다.

짜임새 있는 영화를 볼 때 우리 눈은 스크린에 투사되는 영상만을 보지 않는다. 보다 넓고 깊이 있는 메시지를 본다. 탁월한 심미안과 연출력을 가진 감독이 만든 영화는 우리 시각을 역사와 문화 전체로 확장시킨다. ‘아르테미시아’나 ‘프라다’와 같은 영화가 단순히 누군가의 전기영화가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화가 그린 화가들은 역사에 한 획을 그었고, 감독들은 그들의 삶과 작품을 따라가며 관객들이 영화 너머의 것들도 볼 수 있도록 크고 작은 미학적 연결고리를 마련했다.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남자의 벗은 몸을 그리고 싶어요.” 어린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목소리는 문화와 역사를 바꾼 외침이었다.

네덜란드의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가 진주 귀걸이를 걸기 위해 하녀의 귓불에 구멍을 뚫었을 때, 그 작은 움직임 속에는 17세기 네덜란드 황금시대에 돈에 쪼들리던 한 화가의 외로운 삶이 들어 있었다.

19세기 미국의 화가 윌리엄 터너가 숨을 거두며 남긴 “태양은 위대하다”는 말은 인상주의 시대의 서막 앞에 선 노화가가 마지막으로 보낸 찬사였다. 터너가 죽자 태양은 모든 상징성을 잃고, 누구도 태양을 그리지 않는 인상주의와 영화의 시대가 열렸다.

영화의 터전은 문화와 예술이다. 영화 ‘타이타닉’에서 잭이 그린 로즈의 초상화는 서구 미술사의 한 장르인 ‘누워 있는 누드’다. 로즈를 그리는 잭이 화면에 나타날 때 미술사에 등장한 수많은 누드화를 떠올릴 수 있다면, 타이타닉은 단순한 재난영화가 아닌 미술영화가 될 수 있다.

메릴린 먼로가 치마를 펄럭이며 웃고 있는 영화 ‘7년 만의 외출’에서는 보티첼리의 대작 ‘비너스의 탄생’을 엿볼 수 있다. 두 이미지에서는 ‘바람’이 연상의 매개체다. 미술과 영화는 본질적인 의미에서 처음부터 하나였다. 그림은 살아움직여야 하고, 우리는 그 살아있는 그림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영화 역시 살아 움직이는 그림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권구성 기자 ks@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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