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지만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교수들은 출퇴근이 비교적 자유로웠다. 오늘날에도 일반 직장인과 견주어 보면 교수의 업무 일과는 느슨한 것이 사실이다. 한편 거지가 손에 늘 쪽박을 들고 다니듯 교수는 항상 가방을 들고 다닌다. 그런가 하면 요즘 교수가 되기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일단 교수 자리를 얻으면 그 자리를 지키려고 안간힘을 쓴다. 해학과 풍자를 무기로 삼아 현대 사회의 여러 문제점을 날카롭게 비판해 온 이근삼의 기지와 재치가 보석처럼 빛을 내뿜는다.
김욱동 서강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
교수를 뜻하는 영어 ‘프로페서’는 중세 라틴어 ‘프로페수스’(professus)에 뿌리를 두고 있다. ‘프로’란 ‘앞에 나서서’라는 뜻이고, ‘페수스’란 ‘말하다’ ‘증언하다’ ‘언명하다’ 등을 뜻한다. 그러니까 교수란 한마디로 학생이나 대중의 앞에 서서 자신의 입장을 떳떳하게 공언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무엇보다 ‘공개적으로’ 또는 ‘자발적으로’라는 의미에 무게가 실린다. 굳이 먼 데서 예를 찾을 필요도 없다. 교수라고 할 때의 ‘敎’ 자를 찬찬히 뜯어보라. 세계 언어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표의문자라고 할 한자는 글자 모양만 보아도 대충 그 뜻을 헤아릴 수 있다. 가령 가르칠 ‘敎’ 자도 예외가 아니어서 산가지, 즉 회초리 효 ‘爻’자에 자식을 뜻하는 아들 ‘子’ 자와 때릴 복 ‘?’ 자로 구성돼 있다. 그러니까 교수란 자식을 회초리로 때려가면서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사람을 뜻한다. 물론 그렇게 자식이나 학생을 가르치는 것은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이야기일 뿐 현대 사회에는 그렇게 체벌로 가르칠 수는 없다. 교수가 이렇게 엄격하게 학생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교수 자신이 먼저 올바른 길에 서 있어야 함은 새삼 말할 나위가 없다.
그렇다면 동양에서나 서양에서 교수의 이미지는 정도(正道)와 모범이다. 대중 앞에 서서 한 점 부끄럼 없이 진리를 말하거나 올바른 길을 걸어 학생들에게 스스로 모범을 보여주는 사람이 곧 교수다. 이런 올바른 교수상(像)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인물이 다름아닌 곡학아세(曲學阿世)를 일삼는 교수들이나 학문보다는 정치에 관심이 많은 ‘폴리페서’들이다. 물론 이런 교수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을 뿐 대다수의 교수는 교수로의 본업인 교육과 연구에 충실하고 있다. 그러나 일어탁수(一魚濁水)라는 고사성어도 있듯이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온통 흐릴 수도 있다. 요즘 일부 교수의 일탈 때문에 나머지 교수들도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한다. 지금은 ‘교수’의 참다운 의미를 다시 한 번 곰곰이 음미해 볼 때다.
김욱동 서강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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