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인제 대원리 '자작나무 숲'
탈때 자작자작 소리가 난데서 자작나무
눈이 많은 강원도에서 만난 백색의 절경
하늘 찌를듯 솟은 기상 순수의 세상을 만났다
산을 그릴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색은 녹색과 갈색이다. 수풀이 우거진 산을 녹색으로 칠하고, 군데군데 나무를 갈색으로 그린다. 산이라고 하면 마치 공식처럼 떠올리며 그리던 풍경이다. 하지만 고정관념일 뿐이다. 굳이 녹색과 갈색을 고집하지 않아도 된다. 겨울이 되자 온 산에 흰 물감이 뿌려졌다. 순백의 세상이 펼쳐진 듯 농암의 차이만 있을 뿐 산이 하얗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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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인제 자작나무숲은 순수의 세계를 펼쳐 놓은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눈이 내려 하얗게 변한 세상과 하얀 나무 줄기들이 하늘을 향해 곧게 뻗어 있어 경이롭기까지 하다. |
화려하게 채색된 수채화의 다양한 색을 찾으며 감탄하던 우리에게 단조로운 수묵화 풍광은 묵직한 감동을 던져준다. 하얗게 변한 세상은 순수함마저 자극한다. 머리가 눈처럼 희끗희끗해진 중년의 남편은 눈 뭉치를 집어들고, 아내는 “던지지 말라”고 손사래 치지만 눈 맞는 것이 싫지 않은 듯 입가에선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평소 이런 장난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이던 이들마저도 나이를 놓게 한다.
이 순수함을 느끼기 위한 궁극의 장소가 바로 강원 인제 대원리 자작나무숲이다.
눈이 많은 강원도에서도 인제 자작나무숲은 동경의 대상인 순수의 세계를 펼쳐 놓은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눈이 내려 하얗게 변한 세상에 더해 하얀 나무 줄기들이 하늘을 향해 곧게 뻗어 있다. 영화 ‘닥터 지바고’의 배경인 시베리아의 광활한 자작나무숲이나 백두산의 울창한 자작나무숲 등 현실에서 쉽게 접하지 못할 이국적인 풍경을 품고 있는 곳이다.
자작나무는 나무가 탈 때 ‘자작자작’ 소리를 내고 탄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자작나무는 한자로 ‘화(樺, 자작나무 화)’를 쓰는데, ‘빛날 화(華)자’로 쓰기도 한다. 결혼식의 화촉(華燭), ‘축 화혼(祝 華婚)’ 등은 전깃불이 없던 시절 자작나무 껍질에 불을 붙여 촛불 대용으로 사용한 데서 비롯됐다. 경주 천마총 말안장을 장식한 천마도의 재료도 자작나무 껍질이다.
트레킹 시작은 ‘원대산림감시초소’부터다. 차를 주차장에 세운 뒤 나선 길 건너편에 초소가 있다. 간단한 인적사항을 적은 후 ‘순수의 세계’를 보기 위해 산길을 탄다. 산 전체가 자작나무만으로 덮인 곳이 아니다. 자작나무 군락지까지 3.5㎞, 1시간은 가야 한다. 길은 차도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잘 정비돼 있지만, 그래도 산길이다. 운동화나 등산화가 필요하다. 특히 겨울엔 눈길 미끄럼을 방지하기 위한 아이젠이 있으면 한결 도움이 된다. 없다면 초소 근처 매점에서 판매하고 대여도 해준다.
초소에서 얼마 가지 않아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왼쪽은 3코스 하산길로 자작나무숲을 둘러보고 오는 길이다. 겨울엔 계곡이 얼고, 눈이 깊게 쌓여 3코스는 자주 통제된다.
오른쪽 길을 타고 오르면 소나무들 사이로 하얀 수피로 덮인 자작나무들이 띄엄띄엄 서 있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고, 제법 길을 올랐다 싶으면 왼편으로 자작나무 군락이 모습을 드러낸다. 저기가 군락지인가 싶어서 산길을 타고 내려가야 하나 하고 잠시 고민을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다. 정상에 이르면 이런 풍경은 금세 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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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여왕’이라 불리는 자작나무들 사이를 걸어본다. 여기저기 고깔모자를 쓴 요정들이 나무 뒤에서 얼굴을 쓱 내밀 것만 같다. |
좀 더 오르면 화장실이 나온다. 이곳을 지나면 ‘속삭이는 자작나무숲’으로 내려가는 계단길과 마주한다. ‘진짜’는 여기다. 계단 앞에 서면 그동안 봤던 숲과는 다른 이국적인 풍경에 멈칫한다. 하얀 눈과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흰 피부를 자랑하며 늘씬하게 뻗은 나무들이 그려내는 ‘겨울 왕국’을 보면 환호성이 절로 쏟아진다.
계단길을 내려가 자작나무숲 광장에 들어서서 ‘나무의 여왕’이라 불리는 자작나무들 사이를 걸어본다. 여기저기 고깔모자를 쓴 요정들이 나무 뒤에서 얼굴을 쓱 내밀 것만 같다. 흰 눈으로 덮인 땅을 바라보고, 파란 하늘을 바라본다. 파란 하늘을 보면서 자작나무의 높디높은 코끝을 바라보는 것도 놓치지 말자. 광장엔 전망대와 움막 등이 설치돼 있다. 기념촬영을 하기에 제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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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숲 가는 길에 있는 하트 모양의 조형물. |
숲에 들어서면 산책코스가 3곳으로 나뉜다. 1코스인 자작나무코스(0.9㎞), 2코스인 치유코스(1.5㎞), 3코스인 탐험코스(1.1㎞)가 있다. 2코스는 1코스를 돌아본 뒤 가는 코스인데, 산을 하나 넘어야 한다. 자작나무도 그리 많지 않다. 1코스를 돌아본 뒤 3코스로 하산하는 것이 좋은데, 겨울엔 3코스는 위험해 통제하니, 1코스만 돌아보고 내려가도 된다.
처음 경험하는 이국적인 겨울풍경을 바라보며 여유를 느낀다. ‘자연이 주는 힐링’을 마음껏 품은 뒤 자작나무 사이로 지나가는 겨울이 못내 아쉬워진다.
인제=글·사진 이귀전 기자 frei5922@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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